"우크라이나의 자유와 국권 회복을 위해 함께 할 것." 16일 밤 9시쯤 대통령실 뉴스룸 '대통령의 말과 글'의 머리글 제목이다. 사흘 전 한-우크라이나 확대회담에서 대통령 모두 발언의 일부다. 외교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시간, 대통령이 함께해야 했던 대상은 '극한 호우'로 피해를 보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지난 11일부터 시작한 대통령의 리투아니아-폴란드-우크라이나 순방의 가장 큰 특징은 굵직한 현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가장 빈약했던 것이 빌뉴스에서 지난 11~12일 열렸던 나토 정상회의다. 인도·태평양 4개국(IP4)의 일원으로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과 함께 참석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의 11일 양자 회담에서 기존 국가별 동반관계 협력 프로그램(IPCP)을 국가별 맞춤형 동반관계 계획(ITPP)으로 격상한 합의에 서명했다. 해양 안보와 △신기술 △사이버 △기후변화 △(경제) 회복력 △비확산 △대테러 △정보공유 등 11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키로 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가 지도자가 명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세부적인 사안들이다.
나토의 동아시아 정치 자체가 '빛 좋은 개살구'로 비친 이유다. 12일 IP 4개국 및 유럽연합(EU) 지도자와 함께한 회의에서는 생각을 털어놓고, 촉구하는 수준의 말이 있었다. 대통령은 "우리(아시아태평양) 4개국은 나토와 연계, 강력한 집단안보태세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인·태 지역에서 지역 안보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4개국 정상이 집단안보의 틀이나, 주도적 역할을 합의했다는 공식문서는 없었다.
12~14일 폴란드 방문 역시 '1호 영업사원'답게 양국 경제협력 강화를 다짐하고 "우크라이나 재건에 최적의 파트너"임을 강조한 것 외에 뚜렷한 의제가 없었다. 지난해 한-폴란드 간 교역액이 사상 최대치인 90억 달러에 달한 점을 강조했지만, 이는 정부 정책의 성과라기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특수에 편승한 무기 수출 덕분이었다.
순방기간을 2박 3일 연장하면서 강행한 우크라이나 방문 기간 피해는 집중됐다. 문제는 15~16일 우크라이나 방문 역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현안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를 추진키로 합의했지만, 대통령실 설명대로 △안보 지원 △인도적 지원 △재건 지원이 골자였다. 키이우 방문 자체가 미국, 영국, 일본, 스페인은 물론 아프리카 7개국 정상이 '안전하게' 거쳐 간 뒤에나 성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방문에 즈음해 대통령실이 총동원돼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듯한 극적인 요소를 홍보했다.
한국 시각 기준 11~16일은 전국이 '극한 호우'로 고통을 받는 6일간이었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11일부터 인명피해와 도로유실, 농경지 침수, 정전 피해가 잇따르고 있었다. 고령자 두 명이 부산 사상구 학장천 주변과 경기 여주에서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12일에도 서울, 부산, 광주, 경북 등 5개 시도 13개 시군구에서 37가구 59명이 일시 대피했고, 20가구 40명이 귀가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 상황센터에서 관계기관과 영상회의를 갖고 "선제적인 대피와 통제가 충분치 못했다"고 질타하면서 사전 대비를 '긴급' 지시했다. 이미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 나온 '긴급 지시'가 생뚱맞았다.
총리실이 적극 나서는 모양을 보였지만, 피해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16일 중대본이 공식 집계한 피해 상황을 보면 9일부터 이날 오전까지 사망, 실종이 43명이었다. 충북 오송 지하차도 침수 사고 탓에 피해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열흘 남짓한 기간 인명피해가 2020년 54일간의 최장 장마 기간 발생한 호우 및 태풍으로 인한 사망, 실종자 수(46명)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민이 가족은 물론, 집과 농작물 등을 잃고 대피소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시간 순방길에 나선 대통령실은 평온했다. 11일에는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절을 위해" 빌뉴스 구시가지 산책을 하다가 미국 대표단 직원들을 만나 '아메리칸 파이'를 떼창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통령 순방기간 누리집에 오른 첫 번째 서면 브리핑의 내용이었다. 긴급호우에 대비해 과도할 만큼 선제적 대응을 하라고 지시하고 출국 전 서면브리핑에서 강조한 뒤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12일에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탓에 긴급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를 빌뉴스에서 주최했다. 이날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는 빌뉴스 중심지에서 명품 편집매장 5곳을 돌며 쇼핑을 즐긴 사실이 현지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물론 '대통령실 뉴스룸'에는 관련 소식이 없다. 김 씨가 나토 정상 배우자 프로그램에 참석, "평화와 희망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마음 한국에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소개했을 뿐이다.
대통령실 뉴스룸의 브리핑에 오른 15일 첫 소식은 대통령 부부가 '폴란드 미래세대와의 문화동행' 행사에 참석했다는 이도운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이었다. 공식 활동에 더해 대통령 부부와 관련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전하던 '브리핑'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이날 두 번째 게시물부터다.
김은혜 홍보수석이 직접 나서 대통령이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재난에 총력 대응할 것"이라고 지시했다는, 한 문장짜리 서명 브리핑을 내놓았다. 한덕수 총리에게 그리 당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우크라이나 방문 및 한-우크라이나 정상회담 예정을 소개한 뒤 다시 대통령이 "가용한 인적, 물적 자원 총동원, 인명피해 최소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당부했다"는 서면 브리핑이 올랐다. 키이우 현지에서 "중대본과 화상 연결해 한 총리로부터 피해 상황과 대처 상황을 보고받고, 총력 대응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미 전국에서 이미 수십 명이 사망, 실종된 뒤였다.
16일에는 첫 서면 브리핑부터 재난 피해 관련이었다. 폴란드 현지시간 04시 50분(한국시간 오전 11시 50분) 브리핑은 대통령이 역시 중대본과 화상으로 연결해 상황을 긴급 점검했다면서 "이번 폭우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박 2일 동안 점검하고, 지시만 했던 대통령이 드디어 고통을 당한 '국민 곁'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대응이 늦으면 언어가 강해지기 마련이다. 대통령은 중대본에 "경찰은 지자체와 협력하여 저지대 진입 통제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비슷한 시간 충북 오송 지하차도를 지나던 차량 15대가 인근 미호강에서 유입된 물에 잠겨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6일 동안의 ‘극한 호우 지옥’ 속에 대통령실 뉴스룸이 전한 브리핑은 달랑 3개였다.
16일 서면 브리핑은 "대통령이 귀국하는 대로 바로 중대본 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상황을 다시 챙길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바르샤바 현지 브리핑에서 침수 피해가 커지는 상황에 우크라이나 방문을 강행한 것과 관련, “대통령이 당장 서울로 가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중대본 회의에서 나올 대통령의 지시가 기대된다.
러시아 '군사대표단' 방북에 쏠리는 세계의 눈 (0) | 2023.07.26 |
---|---|
미 전략핵잠함 켄터키함 입항, 자 이제 대한민국은 더 안전한가 (0) | 2023.07.20 |
나토의 '동아시아 정치'는 왜 빛 좋은 개살구로 보이나 (0) | 2023.07.14 |
오염수 방류 반대? 북한 담화에는 왜 '인민 배려'가 없을까 (2) | 2023.07.14 |
NATO '포스트 탈 냉전시대' 강한 군사 동맹으로 변신 (0) | 2023.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