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회의 전투비행을 수행한 비행사들을 포함한 소련 군인들도 (한국전쟁에서) 원수를 격멸하는 데 무게 있는 기여를 했다. (…) 현시대의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여 친선과 선린, 호상 방조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풍부화해나가는 게 특별히 중요하다. (러·북) 양국의 연대성은 국제법의 우위와 안전의 불가분리성, 국가의 자주권과 민족적 이익의 존중에 기초한 다극화되고 정의로운 세계질서 확립을 저해하는 서방 집단에 맞서 나가는 공동의 이해와 결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전 70주년을 맞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축하연설문의 요지다.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27일 북한의 전승절 기념 보고대회에서 대독했다. 푸틴은 한국전쟁에서 맺은 동지적 관계를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시점과 연결시켰다. 새로운 러·북관계의 선언문인 셈이다.
관계파탄을 선언하지 않았을 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누적된 남한의 비우호적 입장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제 러·북 군사협력이 한반도 안보 환경에 상수(常數)로 작용하게 됐음을 상징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7일 쇼이구 장관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에 초청해 면담하고 오찬을 함께 나눴다. 26일에는 '무장장비전시회·2023'을 함께 참관했다. 이 자리에는 화성·18형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북한의 무인 정찰기와 무인 공격기 등이 공개됐다. 쇼이구는 군사대표단 단장이자 푸틴의 특사 자격으로 1박2일 동안 김 위원장과 몇 가지 일정을 함께 소화한 것이다.
26일에는 북·러 국방장관 회담도 열렸다. 쇼이구는 강순남 북한 국방상과의 회담에서 "양국 간 전략적·전통적 우의와 협조를 확대해 두 나라 군대 간 전투적 우의와 협조를 확대발전시키기로 다짐했다." (조선중앙통신) 군사협력의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상호 관심사인 지역 및 국제 문제에 대해 완전한 견해 일치를 보았다"라고만 강조했다. 러시아 투데이는 "역사적인 회담"이라고 평가하면서 쇼이구는 "오늘 회담이 양국 국방부 간의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북한 측에서 군 1인자인 정경택 총정치국장과 임천일 외무성 부상 등이, 러시아 측에서는 알렉세이 크리보루츠코 국방부 차관, 안드레이 루덴코 외교부 차관 등이 참가했다.
아직 북·러 간 군사협력이 어느 수준으로 전개될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일관되게 남한에 중점을 두었던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이 이제 북한으로 초점을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특히 북핵문제 논의에서 한국과 보조를 맞춰왔다. 우리로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전략적 자산을 군사적 부채로 돌린 꼴이다.
북·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뒤 급격히 밀접해졌다. 러시아는 안보리 제재 결의에 따라 2020년 10월 중단했던 대북 정제유 선적을 지난해 12월 재개했다. 지난달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금까지 6만 7000배럴을 보냈다. 김 위원장은 올해 푸틴에게 두 차례 축전을 보내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전했다.
지난달 12일 러시아연방 건립기념일인 '러시아의 날'을 맞아 푸틴에게 보낸 축전에서 "전략적 협조를 더욱 긴밀히 해나갈 용의를 확언한다"고 강조했다. 2차대전 승전기념일인 5월 9일에도 "국제적 정의를 실현하고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다시 한번 뜨거운 전투적 인사를 보낸다"고 전한 바 있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를 러·미 관계와 반비례해 운영해온 경향이 있다. 미·러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북한에 접근했고, 미·러관계가 우호적일 때는 거리를 두어왔다. (밴 잭슨 웰링턴대 교수) 북한 역시 대미 관계가 난관에 봉착하면 러시아를 찾았다. 김 위원장은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두 달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의 일관된 지지와 남한의 일관된 비우호적 조치 탓에 북·러 협력을 강화할 유인이 더 늘었다.
이번 러시아 군사대표단의 방북이 종래와 달리 미국은 물론, 한국을 상대로 한 이중의 메시지를 담은 군사외교였던 이유다. 미국에 대해서는 러시아 외교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에는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의 '문턱'(red line)'을 넘지 말라는 경고의 성격을 띤 것이다. 한국이 문턱을 넘지 않더라도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조치가 계속된다면 얼마든지 맞대응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결국 북·미 군사적 협력의 내용은 한국의 향후 한국의 행보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예년 수준'의 대표단 파견
정전 70주년 기념행사에 당·정부 대표단을 파견했던 중국은 러시아와 달리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년 수준의 당·정부 대표단을 보내 기존 우호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단장을 맡은 리훙중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의 직급 자체가 정전 69주년이었던 작년 대표단장과 같았다. 시진핑 주석은 김 위원장에 보낸 친서에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 인민군이 함께 싸운 전우임을 강조하고 "국제 풍운이 어떻게 변하든 중·북 관계를 잘 유지하고 공고히 발전시키는 게 중국 당과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별다른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 자체가 또 다른 강대국 정치의 일환이다.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단장 인선부터가 중국이 미국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라면서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 책임연구위원은 북·중이 공개하지 않았지만 "시 주석이 오는 9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북한 대표단을 초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7월 10일 전면 개통하기로 했지만 정상화되지 않고 있는 북·중 국경 문제도 논의됐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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