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 창설은 21세기에 일어난 가장 특별한 일이었다. 우리는 신규 회원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해 계속 브릭스를 확대할 것이다. 지도자의 이념적 사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나라가 가입 기준 안에 있느냐가 관건이다. 브릭스는 이제 경제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G7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77)의 실용주의 리더십이 '글로벌 사우스(the Global South)'를 휘저어놓고 있다. 룰라는 지난 24일 끝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서방이 주도해온 질서에 단호히 반대하되, 브릭스를 '반서방 진영'으로 확대하려는 중국과 러시아의 의도에도 반기를 들었다. 어느 진영에도 동조하지 않으면서, 어느 진영도 내치지 않는 게 룰라가 걷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이다. 갈수록 진영화되는 세계에서 룰라의 비전은 글로벌 사우스에 의한 글로벌 사우스를 위한, 글로벌 사우스의 '다른 세계'였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글로벌 사우스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략적 경쟁을 강화하는 시점, 룰라가 말한 글로벌 사우스는 사뭇 결이 달랐다.
"브릭스는 G7, G20, 미국의 대항마 아니다"
미국·서방과 중국·러시아는 각각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인구와 자원을 탐낸다. 특히 미·중 전략적 경쟁이 강화되면서 한층 글로벌 사우스의 지위가 높아졌다. 룰라는 그러나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가 결합하는 '제3의 길'을 제안했다.
브릭스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등 기존 5개국에 더해 이집트·에티오피아·사우디아라비아·이란·아랍에미리트·아르헨티나 등 6개국의 가입을 확정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브릭스 11개국의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GDP의 36.7%로, G7의 29%를 추월했다.
그렇다면 브릭스는 확대된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러는 브릭스 확대를 미국과 서방에 맞서는 영향력의 확대로 해석한다. 룰라의 해석은 달랐다. 룰라는 22일 소셜미디어로 중계된 브릭스 회의에서 "우리는 주요 7개국(G7)이나, G20 또는 미국의 대항마가 되길 원치 않는다"면서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를 조직하려 할 뿐"이라면서 브릭스의 반서방 진영화에 선을 그었다. 요하네스버그 정상회의에서 결정된 브릭스 1차 확대에 대한 해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룰라가 높아진 브릭스의 협상력으로 풀려는 또 다른 과제는 IMF가 아프리카 각국에 제공한 7600억 달러의 부채 문제다. 지불능력이 없는 채무국에 부채 상환을 압박할 게 아니라 부채를 투자로 전환, 각국의 인프라 건설에 사용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게 룰라의 지론이다.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룰라의 말에서 반미, 반서방의 전투적 구호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브라질 대통령 집권 1기(2003~2010년) 때만 해도 룰라는 지구 차원의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낳은 미국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가 다분했다. 그랬던 룰라는 브릭스의 커진 협상력으로 세계 지정학에서 두 가지 변화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우선 유엔 안보리와 교토 의정서 등 글로벌 거버넌스(통치체계)의 개혁이다.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지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GDP의 역전으로 G7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브릭스 확대로 "세계는 지정학적 논의에서 더 균형 잡혔다"고 평가한 까닭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서방에 의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룰라의 설명대로 한때 아프리카는 물론 중국도 '제3세계'였다. 이후 '개발도상국'이라는 말로 대체됐고, 21세기 들어서는 위계적인 요소가 덜한 글로벌 사우스가 쓰인다. 그러나 지배하는 글로벌 노스/지배받는 글로벌 사우스, 부유한 글로벌 노스/가난한 글로벌 사우스라는 뉘앙스는 여전히 담겨 있다.
반미, 반서방 투사의 귀환?
룰라의 변화를 관찰하려면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렸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에게 승리한 뒤 그가 걸어온 역정을 되돌아 필요가 있다. 보우소나루 치하 브라질은 검·경의 폭력으로 민주주의가 빈사의 기로에 처했었다.
룰라의 외교 행보는 1월 1일 취임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 참석, 국제사회에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2월 워싱턴을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똑같은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중립적인 국가들을 묶어 평화 협상의 가능성을 탐사했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크림반도를 포기하고 전쟁을 중단하라고도 촉구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대해서는 전쟁을 부추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미국 달러화 패권의 폐해를 거듭 지적하면서 브릭스 통화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반미 투사의 귀환으로 읽힌 대목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가난과 굶주림의 개선을 주창하기도 했다.
지난 4월 베이징 방문은 그 정점이었다. 중국은 브라질의 가장 큰 교역상대국으로 경제문제가 중심을 이룰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룰라는 그러나 정치를 말했다. "우리(브라질과 중국)는 정치적 이해가 있다"면서 정치적 이해는 "새로운 지정학을 구축해 글로벌 거버넌스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유엔 등 국제기구에 대한 서방의 지배를 반대하는 데 중국은 중요한 우방이라고도 했다. 서방의 일각에서는 대만 문제와 중국 내 인권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점을 비난했지만, 자이르 보우소나루 집권하는 동안(2019~2022) 악화된 양국관계를 복원하는 데 방점을 놓았다. 룰라의 후계자로 브라질 상원에 의해 탄핵됐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2011~2018.8)의 브릭스 신개발은행(NDB) 총재 취임식 참석도 중요한 일정이었다.
미·중 갈등 시대, 룰라의 길
얼핏 반미, 반서방 투사에서 전향한 것으로 룰라의 정체성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에 요약돼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발언"이 문제되자 "(러시아가)우크라이나의 영토 통합성을 침범한 것을 규탄한다"면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협상에 의한 전쟁의 정치적 해법'을 재차 강조하면서 "전쟁이 세계에 끼치는 결과를 우려한다"고 말했다. 서방과 러시아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서, 명분과 실리를 살려 나가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전략적 경쟁을 벌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룰라의 브라질을 환영하는 이유다.
극우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 4년 통치 끝에 룰라가 물려받은 브라질은 부패와 폭력, 경제 부진 등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룰라가 취임한 지 1주일 만인 1월 8일 발생한 보우소나루 지지세력의 연방정부 건물 난입 폭동이 증명하듯 수구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만연한 부패와 폭력, 호세프 대통령을 탄핵한 보수 정치권이 건재하다. 룰라 1기 집권 8년 동안 어느 정도 발전했던 것으로 보였던 브라질 민주주의는 여전히 기로에서 많이 회복되지 못했다.
구매력 기준 GDP가 세계 8위 국가라지만, 극심한 양극화는 뿌리가 깊다. 그러나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보여준 룰라의 글로벌 리더십은 극우정권이 망친 나라와 국제적으로 실추된 국가 이미지를 어떻게 살려 나가는 제 그 전범을 보여준다. 적어도 미·중 갈등으로 격동하는 국제정세에서 브라질은 확실히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룰라의 북극성은 '실용주의'였다. 빈곤 추방과 지속가능한 발전, 양극화 철폐. 브라질 국내와 세계 차원에서 그가 설정한 목적지는 같다. 다만 가는 방법을 달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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