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월러스 뉴욕 검찰청 검사: Mr. 트럼프, 당신이 현재 '트럼프 그룹'의 가장 높은 의사결정자인가.
트럼프: 아니다.
월러스:그럼 누구인가.
트럼프: 내 아들 에릭이 나보다 훨씬 더 그룹에 관여하고 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 '다른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뉴욕 검찰청 조사과정에서 한 말이다. 뉴욕타임스가 30일 당시 7시간에 걸친 트럼프 심문록을 입수해 전했다. 트럼프의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트럼프 그룹(the Trump Organization)은 1927년 트럼프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크라이스트가 건립해 아버지 프레드를 거쳐 1971년부터 트럼프가 운영해온 부동산 그룹이다. 사업체 500개의 그룹이고, 그중 절반이 업체명에 '트럼프'를 쓰고 있다. 'E Trump & Son'이 그룹명이고 뉴욕 트럼프 타워가 그룹 본사이다. 트럼프는 그러나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자식들 명의로 바꾸어 놓았다.
뉴욕 검찰이 제기한 혐의는 트럼프 그룹의 자산규모를 22억 달러로 부풀려 그와 그룹이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것. 성폭행과 사기 등 지극히 사적인 혐의에서부터 2020년 대선 불복 의사당 폭동을 조직한 혐의, 조지아주 선거 개입 혐의 등 공적인 혐의까지 다양한 혐의를 쓰고 있는 그에게 제기된 새로운 혐의다. 숱한 범죄 혐의를 받는 그가 또 다른 혐의로 기소되는지는 한반도 거주민에게 큰 관심이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위와 같은 심문 도중 느닷없이 꺼낸 '다른 일들'을 설명하는 대목에 눈길이 머문다.
트럼프는 대통령 재임 중 그룹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묻는 검사의 추가 질문에 생뚱맞게 '한반도'를 꺼냈다. "아주 바빴다. 미국 대통령직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라면서 대통령직에 관한 생각을 내놓았다. 그러더니 "내가 북한과 상대하지 않았으면 핵 홀로코스트(대량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지금도 핵전쟁을 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화법은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 횡설수설로 가득 차 있다. 불합리한 추론은 물론, 엉뚱한 여담으로 흐르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딴청을 부리기 일쑤다. 트럼프 그룹의 대표를 맡은 뒤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30여 년 동안 4095건(USA 투데이)의 송사를 헤쳐나온 비결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둘러댄 말 중에 한반도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당선 가능성이 높은 공화당 부동의 1위 대선 예비후보이기 때문이다.
30일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가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한 결과 공화당 대선후보 가능성은 53.6%. 2위 드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13.5%)가 극복하기 불가능한 우세다. 정치인 인기도는 38.4%로 바이든(40.2%)에게 뒤졌지만, 이날 현재 RCP 평균치는 44%로 바이든(43%)을 앞섰다. 지난 2일 뉴욕타임스/시에나대학 공동여론조사에서 내년 대선 성공 가능성은 바이든과 동률(43%)이었다. 뉴욕타임스를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의 답"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트럼프는 미국 검찰로부터 4번 기소됐다. 수사와 판결에 따라 대선후보 자리를 박탈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 세계가 지겹게 들었던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라(think the unthinkable)'는 말을 잊으면 경치기 십상이다.
각국은 이미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에 대비해 보험을 들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2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올라프 숄츠 총리의 독일은 워싱턴을 들락거리며 공화당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유럽 자체 무기 생산 역량을 늘리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임 중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를 공언했던 트럼프다. 주요 7개국(G7) 국가들은 각각 트럼프 복귀에 대비해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을 위한 양자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는 "당선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이내에 끝내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길 일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는 터무니없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했었다. 주일미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든 행정부와 같이 동맹과 우방을 중시하는 정책에서 이탈할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사실은 트럼프가 퇴임 2년이 지난 시점, 검찰 심문에서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업적 1위로 한반도 핵전쟁 위기 돌파를 꼽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2017년 취임 첫해 전개됐던 한반도 전쟁 위기 국면에서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가장 임박한 외교안보 위기'로 한반도 문제를 물려받았다면서 문제 해결에 소매를 걷고 나섰었다. 처음엔 '화염과 분노' '북한의 완전한 파괴' 등 호전적인 말로 시작했다가 '친애하는 위원장'과의 독특한 우정으로 끝났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회담이 결렬된 뒤에도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친분'을 과시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친분을 강조해왔다.
북·미 지도자의 이상한 브로맨스가 재연되면 한반도는 생소한 상황을 다시 겪게 된다. 미국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기묘하게 정책의 일관성을 보인다. 트럼프는 파격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두 차례나 갖는 등 예외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미국 외교안보의 주류에 편승했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지도자들이 거의 대부분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No deal)을 환영했던 배경이다.
그러나 '대통령 트럼프'의 DNA 중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거래주의'이다. 동맹과 우방에 더 혹독하게 청구서를 내밀었다. 여느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노골적으로 솔직한 게 늘 문제였다. 미국의 압도적인 위치를 늘 각인시켰다. 그렇다면 민주당 전통의 합의 주의가 탄생시킨 8·18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합의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는 "캠프 데이비드 회의를 지배한 건 중국과 북한, 도널드 트럼프였다"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등장 가능성을 고려, 한미일 협의를 제도화, 정례화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뉴욕 검찰 심문록의 한 대목이 돌연 상기시킨 2025년 1월 20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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