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는 무엇 하나 빈말이 없다. 과녁과 대상(오디언스)을 정확하게 설정한 뒤 말을 하기 때문이다. '돈'과 '표'에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인다. 그 점에서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분석이 어렵지 않은 정치인이다.
'베이스 정치'
트럼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후보가 지난 10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이 (약속한) 방위비 증액을 하지 않으면,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미국과 유럽을 뒤흔들었다. 재임 중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댓바람에 "5배 올리라"는 협박을 받았던 한국에 주는 함의도 적지 않다.
트럼프는 나토 조약상 집단방위 의무를 '돈' 문제로 간단히 치환했다. 그는 이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유세 도중 "(유럽의)큰 나라 대통령 중 한 명이 '만약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러시아의 공격을 받으면 당신은 우리를 보호할 건가'라고 물었을 때 '아니다,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소개했다. 트럼프는 "나는 러시아인들이 원하는 걸 내키는 대로 모두 하라고 격려할 것"이라면서 "돈을 내지 않았으니, 채무불이행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재임(2017~2021) 중 한 나토 회원국 정상과 나눈 대화였다. 트럼프의 말은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았다.
당장 올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맞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날 성명을 내고 트럼프의 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폴란드와 발트해 국가들을 공격해도 된다는 청신호라며 "끔찍하고 위험하다"고 되받았다. "군 통수권자의 책임을 무겁게 여겨야 한다"는 점잖은 충고도 덧붙였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11일 "동맹이 서로 방어하지 않을 거라는 암시는 우리 모두의 안보를 훼손하고 미국과 유럽의 군인들을 위험하게 한다"고 비난했다.
트럼프가 '돈' 문제로 나토를 뒤집어 놓은 건 처음이 아니다. 재임 중이던 2018년 7월 브뤼셀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국내총생산(GDP)의 2% 선까지 올리기로 합의(2014년 웨일스 정상회의 가이드라인)한 회원국들이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맹을 일순간에 흥정대상으로 전락시켰다. 당시에도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비슷하게 반발했다. 오죽하면 도날드 투스크 당시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현 폴란드 총리)이 "적보다 못한 친구"라고 통분했겠나.
공개적인 푸틴 흠모
트럼프가 동맹과 우방을 당혹케 하고, 가상 적국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호감을 보이는 것 역시 뉴스가 아니다. 푸틴 대통령을 흠모하는 건 트럼프는 물론,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RN) 대표를 비롯한 서구 극우 포퓰리즘 지도자들의 공통된 정서다. 따라서 트럼프의 한마디에 깜짝 놀라 익히 예상되는 반응을 내놓는 건 의미가 적다.
그만큼 트럼프를 겪었으면, 그가 비난 반응을 예상하고도 말폭탄을 투척한 까닭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는 트럼프의 양대 화두인 '표' 문제로 접근하면 명확해진다. 트럼프는 '지지층을 향한 정치(Base Politics)'에 능란하다. 야구 선수가 베이스를 염두에 두고 모든 플레이를 하듯, 트럼프의 언행도 자신의 '베이스'를 정확하게 겨냥한다. 트럼프 정치의 제1원칙이다. 평생 돈을 좇던 일개 장사꾼이 공화당을 일거에 장악한 비결이자, 숱한 탈법과 탈선에도 불구하고 오는 11월 미국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건재한 비결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장광설은 팩트에 근거한 것이기에 지지층에 먹힌다. 2023 회계연도 미국 국방예산은 GDP의 3.1%였다. 유럽 선진국들이 수십 년 동안 방위를 미국에 맡기고, 번영을 누려 왔다는 게 상당수 미국인의 불만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의 명분도 "한국과 같이 잘사는 나라는 지출 여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평범한 미국인, 특히 트럼프 지지층은 이러한 말에 열광한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과도한 지원에 반대하는 일반 여론이 절반에 육박한다.
AP-NOC 센터의 2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48%가 우크라에 대한 무기 지원에 찬성했다. 2022년 5월 조사의 60%에 비해 줄어든 것이다. 트럼프는 바로 이 지점을 노렸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과반을 넘겼다.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군사동맹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되풀이 한 바이든이 건질 표보다 트럼프가 건질 표가 더 많은 것이다. 다만 이번엔 바이든도 약간 이득을 본 소동이었다.
바이든이 웃은 이유
뉴욕타임스는 12일 "트럼프의 나토 발언이 바이든에겐 망외의 도움이 됐다"고 지적했다. 최근 다시 불거진 고령과 기억력 논란으로 곤혹스러웠던 바이든 선거캠프에 트럼프와 차별성을 부각함으로써 유권자들의 '관심이동' 효과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돈'과 '표' 계산에서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갈수록 확산되는 미국민의 '우크라이나 피로증'을 감안하면, 더 많은 표를 챙겼고, 11월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게 현실정치다.
트럼프의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기도 하다. 독일 에콘폴(econPOL) 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2023년 말 현재 나토 30개 회원국 중 'GDP 2%'의 문턱을 넘은 나라는 미국과 영국 등 11개국에 불과했다. 작년 4월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는 제외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을 포함한 32개국의 평균 국방예산은 2.6%이지만, 전체 나토 회원국 국방예산의 3분의 2가 넘는 미국을 제외하면 평균 1.8%에 불과하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엑스 계정에서 '나토의 안보에 관한 (트럼프의) 무모한 발언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뿐"이라고 반박하면서도, "EU가 시급히 전략적 자율성을 발전시키고 국방에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 그의 발언으로 다시 한번 드러났다"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의회는 그대로(윤석열 대통령 7일 KBS 대담)"라고? 국가 간의 약속과 동맹의 가치는 잊어라! 세계가 벌써부터 '거래의 기술'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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