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2차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가시화된다면 초미의 관심이 쏠리는 지점은 2000년 친선·협력 조약의 개정 여부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 간 우호협력을 다짐하고 접촉면을 넓히는 일상적인 정상회담의 궤를 넘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북·중·러 연합훈련 참가와 대러시아 포탄 공급 및 러시아의 대북 군사기술 지원은 의제의 구체적인 항목일 뿐이다. 북·러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진영 간의 대치 구도에서 어떠한 기본입장을 수립하느냐는 게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단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떠한 방식의 협력 강화이건 필연적으로 한·러 관계와 역행할 것이 예상된다.
북한과 러시아는 1991년 8월 소련 해체 뒤 10년 가까이 냉각기를 갖다가 관계를 복원했다. 러시아는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 담겼던 1961년 '우호 협조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조·소 우호조약)'을 1996년 폐기했다. 이를 대체한 게 2000년 2월 9일 이바노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평양에서 체결한 친선·협력 조약(친선, 선린 및 협력에 관한 조약)이다. 2000년 조약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우호조약 2조에 있던 자동 군사개입 조항 대신, '위기 시 협의' 조항이 들어갔다. 종래의 군사동맹에서 협력의 동반자 관계로 바뀌었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 수준의 '유사시 협의' 원칙으로 대체했다.
총 12개 조항으로 구성된 친선·협력 조약은 경제·과학·기술·문화 분야 등 비군사 분야에서의 협력이 주요 내용이다.
북한은 탈냉전 공간에서 낙후된 재래식 전력을 현대화할 수 있는 군사기술 지원을 기대했지만, 러시아는 경제협력에 집중했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7월 19~20일 사상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러·북 공동선언'을 채택, 친선·협력 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유엔 헌장에 기초한 다극화된 세계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1항은 다극화된 질서와 함께 상호 동등하고 호혜적인 관계의 원칙을 담았다. 2항은 어느 한 국가가 침략당하거나 전쟁 위험이 있을 경우 '협의 및 협력할 필요'를 담았다.
남북한이 외국과 맺은 조약 가운데 '자동 군사개입' 조항을 두고 있는 것은 북·중 조약뿐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역시 제2조에서 "어느 1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미‧일 정상의 8‧18 캠프 데이비드 공동성명도 유사시 '협의 공약'을 포함했다.
국제정세와 관련해 2000년 북·러 공동선언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두 가지다. 우선 (6·15) 공동선언을 지지한다(제3조)는 점과 미국과의 전략핵무기감축협정(START2)의 연장 및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의 준수를 미국에 촉구한 점이다. 두 가지는 현재 모두 표류하고 있는 상태. 남북관계는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단절됐고,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한·미, 한·미·일 군사협력에 몰두하고 있다. ABM 조약은 조지 부시 행정부가 2002년 폐기했고, 미·러 간 START2 역시 아직 유효기간(2026년 2월 5일 종료)은 남았지만 지난 2월 푸틴이 미국 측의 러시아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힘에 따라 사실상 사문화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러 간 접촉점이 사라진 만큼 되살리는 게 녹록지 않다.
북·러간 조약의 역사는 각각 국제정세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이 현재의 정세를 진영 간 대치했던 냉전 시대로 돌아가는 퇴행으로 해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예상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외교 관행이 다르다.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이후 한국 측의 말과 행동이 자신들의 방침과 맞지 않으면 사사건건 외교 경로를 통한 해명 요구와 보복 행동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상대국의 비우호적인 말과 행동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다가 한목에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자체가 그렇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난해 10월 푸틴이 모스크바 발다이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을 금지선으로 설정한 뒤 한국 측의 말과 행동을 주시만 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국빈 방미를 앞두고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민간인 학살 경우 조건부 무기 지원 입장을 밝혔음에도 러시아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국이 살상무기를 건넨다면 "지난 30년 동안 양국 국민의 이익에 부합해 잘 발전해온 양국 관계가 완전한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금지선을 상기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15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전격 방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평화 공식(Peace Formula)'을 지지하고, 지뢰탐지기 등의 군사물자를 제공키로 약속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외교부의 입장은 "한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였다.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는 지지하는 입장에 그 어떤 새로운 점을 보지 않고 있다. 특히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계속 유지되는 것에 주목한다"면서 금지선을 언급했다. '젤렌스키 평화 공식'에는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와 크림반도를 포함한 모든 점렴징 반환 및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전범 단죄 등이 포함돼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 참석중인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러시아 외교부 제1아주국장이 11일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직간접적으로 무기와 군사장비를 공급하는 성급한 결정을 하면 양국 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큰 틀에서 금지선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8·18 한·미·일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합의에 대해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밝힌 입장과 같은 맥락의 경고다. 다만, 갈수록 금지선의 범위가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지난 달 24일 "(한국이) 대러시아 추가제재를 하는 것은 물론 대우크라이나 군사지원을 비롯한 추가 지원 노력을 한다면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의 비우호적 행위가 선을 넘을 경우 "한반도 문제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북·러 정상회담 이후에 나올 변화는 차원을 달리할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가 단순히 한국과 협력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북한과 군사협력을 강화한다면, 한반도 정세는 21세기 이후 처음 보게 될 위기국면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북·러 조약 개정에 달려 있다. 이전의 조약 체결은 모두 모스크바나 평양 등 양국 수도에서 있었던 만큼 회담 장소도 주목된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12일 러시아 방문에 나선 김 위원장이 당과 정부, 무력기관의 주요 간부들이 수행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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