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딱히 돌아볼 고향이 없는 처지에 TV로 보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오랫동안 기량을 갈고닦은 선수들이 내보이는 젊은 에너지가 새삼 스포츠의 미덕을 확인케 했다. 하지만 항저우 아시안게임 경기장 곳곳에서 다시 남북 분단의 생채기를 보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TV에 비친 장면으로 보건대 종목을 불문하고 북측 선수나 임원들은 남측 선수단 및 취재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2일 남북이 자웅을 겨룬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 남측 신유빈-전지희 조가 초반부터 우세를 보이며 연속 두 세트를 선취했다. 쟁쟁한 적수를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것은 북측 차수영-박수경이 상당 수준의 기량을 갖췄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 랭킹이 없었다. 그만큼 오랜만에 국제무대를 밟았다는 말이다. 아세안게임도 처음 출전했다. 긴장한 탓인지 실수를 연발하던 차수영-박수경이 3세트를 챙겼지만, 결과는 남측의 4-1 승. 여자 탁구에서 한국이 21년 만에 금메달을 건져 올렸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께끄름한 장면이었다.
남북 탁구 경기는 33년 만이었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코리아)을 구성하기 전에 맞붙은 뒤 처음이기 때문이다. 차수영-박수경 선수는 시상식 뒤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메달 수여식 뒤 남측 선수들의 제안에 응해 1위 단상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굳은 표정이었을지언정 남측 선수들에게 축하 인사도 건넸다.
남북 단일 '코리아팀'과 '한반도기'의 추억을 되씹으려는 게 아니다. 아시안게임이라는 '창'에 비친 북한의 현주소를 직면하자는 말이다. 북측이 선수·임원들을 통해 거듭 각인시킨 것은 남측과 헤어지겠다는 단호한 결심이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단일팀으로 출전했던 여자 농구는 29일 첫 경기를 치렀다. 남북 경기는 결과보다 그 자체가 주는 함의가 있다. 남측 강이슬은 경기 뒤 "그래도 (5년 전) 같은 팀으로 뛴 선수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눈을 안 마주치거나, 마지막에 하이 파이브를 안 한 게 아쉬웠다"면서 "약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조금 속상했다"고 털어놓았다.
남북이 만난 자리에는 '지뢰'가 있기 마련이지만, 스포츠 경기에서는 그나마 덜했었다. 이번에도 여자 탁구 남북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응원석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다른 종목의 남측과 북측 선수들이 관중석 한 귀퉁이에 위, 아래로 나눠 앉았다. 아래 3~4열에는 남측 10여 명이, 위 3~4열에는 북측 10여 명이 자리해 탁구공이 오갈 때마다 아래와 위에서 번갈아 박수가 나왔다. 남측이 시종 앞섰지만, 응원장의 남북 선수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듯 과장된 몸짓이나, 고성이 없이 평화로이 '공존'했다. 정치적 시비는 국가 호칭에서 빚어졌다.
29일 여자 농구 경기 뒤 북측 선수단 관계자는 남측 기자의 '북한'이라는 말끝에 "우리는 DPR 코리아(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노스 코리아(North Korea·북한)라고 부르지 마라. 그건 좋지 않다.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한다"고 교정했다고 한다. 30일 북한이 4 대1로 이긴 여자축구 남북 경기 뒤 북측 리유일 감독은 '북한'이 아니라 '북측'이라는 말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제적으로 남북의 공식 국명은 '대한민국(RO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맞다. 줄이면 '한국/조선'이다. '북한'은 한국을 중심으로 남측이, '남조선'은 북측이 각각 관행적으로 불러온 국명일 뿐이다. 정확한 국명으로 부르라는 주문이 전혀 틀린 건 아니다.
그런데 '북측'이라는 말까지 제동을 건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2000년 6·15공동선언 뒤 활발해진 수많은 남북 간 교류 때마다 북측은 '남한/북한' 대신, '남측/북측'이라는 호칭을 먼저 강조해 왔다. 개인적으로 2000년 대 초부터 2018년까지 10여 차례 방북 취재 때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북한"이라는 칭호가 입 밖에 나가면, 북측 상대방은 예외 없이 "북한이 아니라, 북측"이라고 수정했다. 분단을 흐린채 한반도 남측, 북측으로 서로 부르자는 말은 건설적인 의미였다. 이제 '북측'이라는 말까지 부정한 것은 '우리민족끼리'를 입버릇처럼 되뇌던 2000년 6·15 선언 자체를 백지화했다는 증좌다. 당·국가 체제인 북한에선 국가 호칭과 남측 사람들에 대한 태도 역시 '당'이 결정한다. 남파 공작원 출신 김동식씨는 4일 시민언론 <민들레>에 "북한의 호칭 시비는 절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대회 전 당 차원에서 지침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북측이 남측을 여느 외국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국가로 부른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멀리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언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미국은 물론, 한국도 없다. 2019년 10월 15일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렸던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H조 경기에서 맞붙은 남북 축구 대표팀 경기가 관중 없이 치러진 게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북측이 국가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한 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해군사령부 방문 당시 남측을 처음 '대한민국'이라고 칭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한 달 전 '대한민국'이라고 칭한 데 이어 남북이 각각 다른 나라임을 거듭 강조했다. 항저우에서 확인된 것은 남측 역시 자신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지칭해야 한다는 게 북측의 사고다.
북한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이 30일 남북 여자축구 경기 뒤 남측 대표팀을 '괴뢰팀'이라고 부른 것은 '계급교양' 차원에서 봐야 한다. 두 매체는 북한 주민들이 접할 수 있는 대내용 언론. 김동식씨는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대내적으로 '괴뢰'라고 칭한 것은 주민들에게 남측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려는 계급교양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급교양은 북한의 주민 교육용어로 적을 대하는 태세를 강조한다. 실제로 일반 주민이 접근할 수 없는 조선중앙통신은 남측 팀을 지칭하지 않은 채 북측 팀의 승리 사실만 전했다. 일부 언론이 '괴뢰'라는 표현에 격분하는 보도를 내보내기 전에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개인 간이건, 국가 간이건 호칭은 관계의 시작점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비하하는 말은 필연적으로 악순환 과정을 거쳐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된다. 북이 남을 '괴뢰'라고 칭하는 건 명백하게 잘못됐다.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제3조) 위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받아 분노와 증오를 확대재생산 하는 것은 그 못지않은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차분히 분석하고 대응할 일이다. 정치가 풀리지 않는 한 스포츠 현장의 분단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경기장 가운데 경계선을 긋고 싸우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격렬해도 나쁠 게 없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 지레 흥분하고 감정을 덧들이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남은 아시안게임 동안 남북 경기는 또 있다. 남이나, 북이나 호칭 문제로 서로 삿대질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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