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한 지난 7일. 한 대학의 34개 학생단체가 가입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PSC)'가 "폭력을 일으킨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정부에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전국적인 비난이 쏟아지면서 대학 당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학 총장은 성명 발표 사흘 만에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잔혹한 테러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성명 내용은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어떤 학생단체도 우리 학교와 그 지도부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데 그쳤다. 총장 성명마저 "학생들의 성명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미국 하버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친이스라엘 여론이 우세한 미국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나마 최근 취임한 클로딘 게이(53) 총장의 리더십이 돋보였다.
PCS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성명은 이번 사태를 낳은 과거와 예측되는 미래의 폭력 문제를 짚었다. 그러나 비난 여론은 당일의 폭력 사태에만 집중했다. 애당초 접점을 찾기 힘든 대화였다. 성명은 "오늘의 사태는 진공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수백만 명은 '지옥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이스라엘 당국자들의 약속대로 지붕 없는 감옥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며 "가자지구의 대학살은 이미 (이스라엘에 의해) 시작됐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향후 며칠 동안 이스라엘 폭력의 피해를 전면적으로 겪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네 단락으로 된 짧은 성명은 이스라엘 비판에 집중했다. "유일하게 비난받아야 할 것은 인종차별 정권이다. 이스라엘의 폭력은 75년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모든 존재의 측면에 구조화했다"고 짚었다. 구조적으로 강요한 폭력의 내용으론 "체계적인 토지 점유에서부터 일상화된 폭격과 자의적인 구금은 물론 군 검문소, 강요된 가족의 분리 및 표적 살인에 이르기까지"라고 들었다. 성명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때론 느리게, 때론 갑작스러운 죽음의 상태에서 살도록 강제됐다"고 본 근거다.
성명이 마지막으로 동료 학생들에게 연대를 제안한 것은 더 큰 폭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오늘 팔레스타인의 시련은 전대미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면서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 주민 절멸을 중단토록 행동을 취할 것을 하버드 공동체에 촉구한다"고 호소했다. 젊은 학생들답게 애매한 양비론을 펼치지 않고, 하마스의 테러 행위를 언급하지 않은 채 더 구조적이고, 더 체계적인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우려를 표명했다.
성명이 지적한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이자,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적이었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성명에 담긴 내용은 외면한 채 생략된 내용에만 확대경을 들이댔다. "하마스의 폭력을 묵인하고 이스라엘의 책임만 물었다"는 이유에서다. 성명의 결론인 이스라엘의 구조적인 대학살에 대한 우려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비난에 앞장선 사람은 재무장관과 하버드 총장을 역임한 로렌스 서머스였다. 그는 8일 자신의 X(트위터) 계정에 "이스라엘만을 비난한 학생그룹의 성명이 광범위하게 보도되는 가운데 하버드 대학 당국이 침묵하는 것은 하버드가 이스라엘 유대인 국가를 겨냥한 테러 행위에 대해 기껏 중립적으로 비치게 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 당원이 그는 "대학 당국이 학생 성명과 학교를 분리하지도, 성명을 비난하지도 않은 게 역겹다"라고도 썼다.
인스타그램을 관리하는 메타 측은 성명 원문을 한동안 삭제했다가 다시 올렸다. 억만장자 헤지펀드 최고경영자(CEO)인 빌 애커만을 비롯한 일부 기업체 대표들은 하버드대에 성명을 발표한 학생들의 명단을 요구했다. 기업체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하버드대 당국은 명단 공개를 단호히 거부했다.
PSC 성명은 지난 주말 보수단체들의 뉴스 사이트에 확산되면서 특히 공화당 동문 정치인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은 9일 "대체 하버드가 왜 잘못된 것인가"라고 썼고, 엘리스 스테파닉 하원의원(뉴욕)은 "하버드 학생단체가 이스라엘인 700여 명을 살해한 하마스의 야만적인 테러 공격에도 이스라엘을 비난한 것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럽다"고 자신들의 X계정에서 각각 지적했다.
게이 총장은 비난 여론을 무작정 수용하지 않았다. 10일 성명에서 "하마스가 자행한 잔혹한 테러를 비난한다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면서 "해묵은 분쟁의 원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이 무엇이건 그러한 비인도적인 행위는 혐오스럽다"고 밝혔다. 다만 "하버드가 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광범위하게 상이한 의견의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환상은 없다. 그러나 배움의 공동체로서 더 넓은 세상에서 고통스럽게도 명백하고 뿌리 깊은 분열과 증오를 확대하기보다 공통의 인류애와 공유된 가치를 토대로 조절할 조치를 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총장 성명은 끝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 격분케 하기보다 (사실을) 규명하는 말로 이토록 어려운 시기를 넘겼으면 한다. 우리 배움의 공동체 모두에게 호소하건대 앞으로의 대화에서도 이를 명심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교내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의 11일 보도에 따르면 비난이 거세지면서 PSC에 참여했던 34개 단체 중 5개 단체가 연대 서명을 취소했다. 바이든은 미국인 14명이 숨지고 일부는 인질이 됐다면서 하마스의 공격을 '순전한 악'이라고 규정했다. 미국 사회의 압도적인 친이스라엘 여론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피해는 늘 비대칭이었다.
2014년 이스라엘 10대 3명 납치 사건 뒤 발생한 50일 분쟁에서 이스라엘인 73명이 숨졌지만, 팔레스타인 측의 사망자는 2000명이 넘는다. 가장 최근의 전면전인 2021년 11일간의 무력 충돌에선 이스라엘 민간인 14명과 군인 1명 등 15명이 숨졌지만, 가자지구에서는 250여 명이 희생됐다. 대부분 인간인이다. 지난 9월 29일 제30대 총장에 취임한 게이는 아이티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368년 역사상 첫 흑인 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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