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평원에 겨울이 찾아왔다. BBC 날씨 정보에 따르면 21일 러시아군이 점령한 돈바스 지방 도네츠크의 기온은 최저 -8℃, 최고 -3℃를 기록했다. 땅이 얼어붙으면 본격적인 군사작전은 쉽지 않다. 마크 밀리 전 미 합참의장이 지난 9월 중순 예상했던 전투 가능 기일은 30~45일. 이미 지난달 말로 끝났다. 봄이 온다고 여건이 좋아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작년 9월 이후 큰 변화 없이 계속돼 온 소모전은 개전 2년 또는 그 너머를 봐야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두 번째 겨울 맞는 전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식어간다. 10·7 시작한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격 때문만이 아니다. 서방이 설계한 전쟁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개전 이후 러시아군의 패퇴와 러시아 경제의 붕괴를 기정사실로 했던 서방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패전의 쓰라림 또는 휴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비관적인 전황 전망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전이 다섯 달을 맞은 이달 초부터 본격화됐다. 외부가 아닌,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진단이다. 발레리 잘루지니 군 총사령관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기고 및 인터뷰에서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들어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소모전이 됐다"면서 반격 작전의 실패를 인정했다. 잘루지니는 "어떠한 깊숙하고 아름다운 돌파는 없다. 그 대신 궤멸적인 손실과 파괴의 균형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토의 20%에 달하는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4개 주의 점령지를 방어하고 있다. 도네츠크주 아비카, 불레다르 및 하르키우주 쿠퍈스크 인근을 비롯한 일부 전선에선 되레 공세로 돌아섰다.
군 총사령관이 전황을 어둡게 진단한 건 더 많은 무기와 지원을 서방으로부터 받아내려는 노력의 일환일 터. 잘루지니는 우크라이나군의 전진을 위해선 △지상전을 지원할 공중 전력의 우세와 △지뢰 제거 장비 △적 포대 공격 수단 △무인기에 대응할 전자전 시스템 △병력 및 훈련 부족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번째까지는 획득 희망 리스트이다. 갈수록 요구하는 무기가 종류와 수준이 달라지고 있다. 크림반도를 공격할 수 있는 중단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가 지난 9월 전장에 도착했지만,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약속한 F-16 전투기는 빨라야 내년 봄에 도착한다.
재래식 전력만 동원하고 있는 러시아군이 그에 상응하는 첨단무기로 대응한다면 교착상태가 계속될 게 분명하다. 더구나 잘루지니가 강조한 마지막 항목은 서방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싸울 사람조차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라면서 "적의 미사일과 전투기가 훈련장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어 우리 영토에서 예비군을 훈련할 장소도 마땅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서방, 특히 미국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미 국민 41%가 "지원 과도하다"
지난 2일 발표된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 41%가 우크라이나 지원이 과도하다고 답했고,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55%였다. 반격전이 시작되던 5개월 전 같은 조사에서 "과도하다"는 응답은 전체 29%에 불과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지난 20일 키이우를 방문,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우크라이나와 함께할 것"을 강조했다. 동맹과 파트너들과 전선의 절박한 필요와 장기적인 국방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는 대놓고 "지원 중단"을 역설한다. J.D. 밴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CNN에 "종국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 통제를 전제로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올해 약속한 240억 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이스라엘 지원 및 멕시코 국경 시설 보완 등과 연계해 추진하고 있지만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 3일 급한 대로 국방부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프로그램'(3억 달러)과 대통령 직권 승인을 통해 4억 2500만 달러 상당의 무기·장비의 긴급 지원을 결정했다. 다연장로켓시스템(HIMAS)과 중단거리 지대공미사일체계(NASAM) 및 포탄, 대 탱크 미사일, 방한 장비 등이다. 서방 언론과 국내 기성 언론은 북한의 대러시아 포탄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잘루지니는 "러시아가 상당 기간 무기와 장비, 미사일, 포탄에서 우위를 지켜갈 것"이라면서 러시아의 무기 생산 및 병참 라인이 개선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가 제시한 유일한 희망은 크림반도 및 흑해 상의 러시아 해군에 대한 공격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10월 30일 자 타임지 인터뷰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이후 서방의 지원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면서 "우리의 승리를 아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9월 워싱턴 방문 때 "몇몇 의원들은 내게 대놓고 '지원을 중단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면서 "어떻게 되냐고? 우리가 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은 우리가 전선에 남아 있되, 승리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만 제공한다"고 불평했다. 전선의 교착은 서방의 지원 의지를 꺾고, 서방의 지원 감소는 다시 전선의 교착을 굳히는 악순환이 예고된다. 외국 돈으로 전쟁을 치르는 구조의 한계다. 그러는 동안 애꿎은 인명만 희생되고 있다.
전선 고착되도, 계속되는 인명 희생 "싸울 병사가 없다"
러시아 언론매체들은 지난여름부터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싸울 의지를 잃고 있다고 전했다. 교전 중인 국가의 언론 보도는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그러나 겨울에 접어들면서 서방 언론에서도 유사한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일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 르포기사에서 "전쟁은 잦아들고 있지만, 사상자가 어느 때보다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의 포격 및 미사일 공격에 노출된 일선의 우크라이나군 병사와 위생병들은 잘루지니가 말한 교착상태의 정적인 느낌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우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면서, 교착은 교착이되 '격렬한 교착상태'로 빠져들고 있다고 짚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사기 또한 가라앉고 있다.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과 정전이 갈마들던 지옥같은 두 번째 겨울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소형 발전기를 장만하는 등 대비를 하고 있지만, 또다시 춥고 불안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난해 겨울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은 주로 발전소를 비롯한 기반 시설에 집중됐다. 작년 10월에서 올 3월까지 주로 도심지역을 겨냥해 1000기의 미사일과 1000번의 무인기 공격을 퍼부었다. 저널은 16일 "러시아의 패배라는 마술적 사고를 끝낼 때"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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