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미국이 횡재했고, 몇 달 뒤 러시아가 벌기 시작했으며, 잘 나가던 독일이 가장 크게 잃었다. 미국 편에 선 국가의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러시아 편에 선 국가의 경제는 망외의 소득을 얻었다. 일단락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달라진 지경학적 대차대조표이다.
미국 횡재, 러시아 성공, 독일 실패
"러시아 경제의 핵심 부문들은 제재에 적응했거나 제재 타격으로부터 완벽하게 회복됐다. 서방 국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회복력을 보였다." 블룸버그 통신의 지난 16일 진단이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 경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춰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짚었다. 러시아가 소련 해체 이후 처음으로 내년 국방예산에 1000억 달러 이상을 배정한 것을 두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27일 "과연 서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자원 투입에 대적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러시아 경제의 회복은 단순히 추세나 숫자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달러화는 여전히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 경제가 달러화 위세를 마주하면서도 거뜬하게 회복한 것은 하나의 새로운 지경학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30억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국가들과의 상호작용이었다.
미국은 개전 1달 전 대러시아 제재안을 완성하고 주요 7개국(G7), 유럽연합(EU), 호주, 싱가포르, 한국, 대만 등 이른바 '비슷한 생각의 나라(LMN)'들과 촘촘한 차단막을 미리 짜놓았다. 윌리 아더예모 미 재무장관이 그해 12월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설명한 제재안은 단기 및 장기 목표를 겨냥했다. 단기적으론 러시아의 전쟁 재원을 고갈시키는 동시에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소프트웨어 등 이중용도 첨단기술 접근을 차단, 군산복합체의 무기 기술과 전력 투사 능력의 퇴보를 노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즈음 몇 차례나 양치기 소년처럼 러시아의 침공을 예견하면서 전쟁을 학수고대했던 까닭이다.
장기적으론 전쟁 전보다 러시아 경제의 허리를 끊어 규모가 30~50% 쪼그라들도록 설계했다. 루블화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하고 러시아산 원유·가스 수출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의 '백지상태'로 돌리겠다고 장담했다. 전쟁 전 배럴당 100달러였다가 전후 160달러로 치솟은 러시아산 원유가의 상한을 지난해 여름 60달러로 낮췄다.
바이든의 1석4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덕에 1석 4조의 지경학적 특수를 누렸다. 외교적으론 전쟁 전 제 갈 길을 가던 독일과 프랑스 등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을 하나로 묶었다. 돈도 벌었다. 개전 직후 세계 경제가 침체 우려로 몸집을 줄이는 동안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는 12%가 올랐다. 엔화 대비 20%, 유로화 대비 11%, 원화 대비 10%로 동맹과 우방의 곳간을 털어 국부를 늘렸다. 나토 회원국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의 2% 이상으로 올리려던 오랜 꿈은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예산을 올리면서 손 안 대고 달성되고 있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미국산 값비싼 무기를 구입한 덕에 방산 수출이 늘었고, 러시아산 저렴한 천연가스를 사들였던 유럽 국가들은 두 배, 세 배 비싼 미국산 액화가스(LNG)를 울며 겨자 먹기로 사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미국의 설계대로 쇠망의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중앙은행은 탈출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를 20%로 올리고, 정부는 외화 반출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했다. 그러나 성장세로 돌아서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유·가스 수출선을 EU 대신 중국과 인도로 대체한 게 주효했다. 전쟁 21개월이 된 현재 서방 언론이 평가하는 러시아 경제의 현황은 이렇다.
제조업에서 항공업계까지 러시아 경제의 각 부문은 소비자 수요 증대와 정부의 견고한 재정을 토대로 제재에 적응했다. 국제금융계에서 퇴출당한 은행 부문의 회복은 가장 주목된다. 최대 국영은행 스베르방크(Sber)를 비롯한 전체 은행권은 올들어 지난 9월까지 3조 루블(330억 달러)의 순익을 얻었다. 당초 중앙은행의 수익률 예상을 3배 뛰어넘었다. 스베르방크의 허먼 그레프 최고경영자는 블룸버그 통신에 "아마도 올해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라고 평가했다. 국내 자동차 시장은 현대차를 비롯한 서방 기업의 탈출로 타격이 컸던 부문. 그러나 새로운 수입원과 대체 공급원을 찾아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삼성 휴대폰 시장은 일본과 중국 업체가 주웠다. 항공업계는 취소된 외국 노선 대신 국내 취항을 늘려 올 3분기까지 전년 동기에 비해 30% 성장했다. 경제성장률은 더 눈부시다.
러시아 3분기 경제성장 5.5%
연방 통계국이 15일 발표에 따르면 3분기에 5.5% 성장, 2분기 기록(4.9%)을 뛰어넘었다. 성장의 3대 축은 높은 에너지 가격과 코로나19 당시 수준의 재정지출 및 개인·기업 대출 20% 증가 등이다. 블룸버그가 "10월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경제는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평가한 이유다. 국고는 넘쳐난다. 올해 10월까지 경상수지는 538억 달러의 흑자를 거뒀다.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의 올해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750억 달러로 예상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달러화 결제망 밖에서 자생력을 확인한 것은 장기적으로 서방과 대적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대외전략에 자신감을 실었다.
물론 러시아 경제의 성공이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정부가 군수산업에 돈을 풀면서 경기가 살아난 덕이 크다. 일종의 전시 특수다. 러시아 정부가 9월 말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는 정부지출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1090억 달러가 국방예산에 배정됐다. 전체의 9.2%는 사법당국 지원을 포함한 '국가안보' 예산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다친 병사와 가족을 위한 보훈 예산도 포함된다. 대한민국 면적과 비슷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작년 9월 30일 병합한 4개 주의 재건 사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민수용품을 생산하던 공장은 무기 공장으로 개조되고 있다.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무기 생산에 투입되면서 경제는 살아났지만,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지 못한다. 되레 인플레 압박으로 생필품 가격이 뛰는 게 고민이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제성장은 이전처럼 원유·가스 가격 상승에만 의존한 결과가 아니다. 지경학적 선택이 열매를 맺은 덕분이다. 중국과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가스의 적극 수입할 뿐 아니라 대러시아 상품 수출을 통해 유럽의 자리를 메웠다. 중국·인도는 러시아로부터 할인 가격에 사들인 에너지를 제3국에 되파는 방식으로 이중, 삼중의 횡재를 챙겼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은 자동차에서부터 핸드폰까지 대러 수출을 늘려 올 1~8월 대러교역이 32% 증가했다. 인도와의 교역은 올 상반기 3배가 늘었고, 튀르키예의 같은 기간 대러 수출이 89% 증가했다. 반면에 미국 편에 적극 가담했던 올라프 숄츠 총리의 독일 신호등 내각(사민당 빨강·자민당 노랑·녹색당 초록)은 내년 예산 중 89조 원이 부족해 사상 초유의 '예산대란'을 맞게 됐다.
러시아 동조 국가는 수익, 미국의 동맹국들은 타격
서방 제재의 단기 목표였던 러시아 무기 개발용 기술 통제도 실패했다. 아르메니아, 조지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러시아의 세력권에 있는 국가들이 첨단기술의 우회 공급 기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들은 과거 러시아가 서방에서 직접 수입하던 소비재의 수입경로 역할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브라질과 남아공 등 브릭스(BRICS) 국가들도 중간 이득을 얻었다. 일본과 프랑스 등 미·러 사이에서 '두줄타기'를 한 국가 경제는 그나마 선방했다.
미국의 셈법은 틀렸다. 러시아는 전장은 물론, 경제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종결되건, 전쟁은 새로운 질서가 태동할 조건이 갖춰지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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