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사우디)양국 정상이 (2030 엑스포 유치전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되 결과에 대해 서로 축하하고 이후 준비 과정에 충분히 협력하겠다는,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10월 22일, 리야드 언론브리핑)
"핵심 파트너국인 사우디가 원하던 엑스포 리야드 개최에 성공해서 정말 축하한다. 우리가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서 준비해 왔던 자료와 경험, 또 자산을 충분히 지원해서 사우디가 성공적인 엑스포를 개최하도록 도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11월 29일, 대국민담화 중)
대통령과 빈 살만은 왜 손을 맞잡았을까
막전 막후에 나온 말이건만 기묘하게 일치한다. 대통령은 2030 엑스포 개최 도시를 선정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투표 한 달 전인 지난달 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언론의 관심은 두 정상이 과연 엑스포와 관련해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에 쏠렸다. 위 문장은 리야드 언론브리핑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자기 생각인 양 말한 내용이고, 뒤 문장은 부산이 리야드에 '119표 대 29표'로 참패한 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한 말이다. 적어도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와 대통령이 '원팀'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도 원팀이었을까. 국민적 충격을 던진 '파리의 굴욕'의 원인을 추적할 열쇠말은 바로 '원팀'이다.
대한민국과 사우디는 지난 1년 동안 두 번 정상회담을 했다. 엑스포 전선에 이상한 조짐은 작년 11월 17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의 방한 당시부터 제기됐다. 대한민국은 한 팀이 아니라 두 팀이었다. 공교롭게 그의 방한 16일 전인 1일 박진 외교장관은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교섭 중간 점검 회의를 열어 "지역별·국가별 맞춤형 전략과 다양한 상황별 시나리오를 마련해 철저히 준비하자"고 다짐했다. 엑스포는 산업자원부 소관이지만, 해외 유치 활동 지원은 외교부가 맡았다.
같은 날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해외 건설·플랜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네옴시티 사업 수주를 위해 "민·관 합동의 '원팀 코리아'를 구성, 전방위 지원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박진의 외교부'는 이미 작년 6월 '민·관 코리아 원팀'을 구성했다. 두 개의 원팀이 동시에 가동되는 희한한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원 장관은 아예 같은 달 4~9일 네옴시티 건설 사업 수주단을 이끌고 사우디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외교부·산자부는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국토부는 네옴시티 건설 수주를 위해 각각 다른 방향의 토끼를 쫓았다. 반면에 사우디 측에서는 단 한 마리의 토끼를 노렸다. 리야드 엑스포와 네옴시티가 모두 빈 살만이 왕위 계승을 앞두고 추진하는 '비전 2030'의 양대 프로젝트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정부 내에서 두 개의 원팀이 뛰는 상황이 벌어졌으면 당연히 대통령이 거중조정을 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역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되레 사우디와 '원팀'을 만들었다. 빈 살만은 방한 길에 한·사우디 기업 간 21조 원(290억 달러)의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돈 보따리를 풀었다. MOU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가 아니다. MOU를 10개 체결했더라도 단 한 개의 계약도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이 미·일·중·인도·영국·프랑스·독일과 함께 비전 2030의 중점협력 8개국의 일원인 건 맞다. 이미 2017년부터 한·사우디 비전 2030 위원회(장관급)를 운영해 왔다. 윤석열 정부는 작년 11월 정상회담 뒤 '전략파트너십 위원회'를 새삼 신설하고, 이를 회담의 핵심성과'라고 한껏 강조했다. 양국 지도자 차원에서 다양한 실질 협력을 총괄, 조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원팀'인 셈이다. 정부가 겉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내심 네옴시티 수주 극대화를 위해 사우디와 '이면 합의'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비롯된 지점이다. 정부는 물론 적극 부인했다. 최태원 대한상의 소장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유치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분주하게 해외 출장을 다녔다.
윤석열·빈 살만 원팀은 투표를 한 달 앞두고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거듭 팀워크를 과시했다. 대통령은 10월 21~24일 리야드 방문 결과로 8개 분야, 44개 항으로 된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중 4개 항을 할애해 '건설 및 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를 다짐했다. 사업 수주는 물론 인프라 투자 관련 금융 협력도 강화키로 했다. 대통령은 23일 리야드 한·사우디 건설 협력 50주년 기념식에 참석, "양국 건설 협력으로 새로운 도시건설 신화를 만들자"고 말했다. 네옴시티 건설 수주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지난해 빈 살만의 방한이 국내에서 이면 합의 의혹을 일으켰다면, 대통령의 사우디 답방은 국제사회에 잘못된 신호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BIE 투표 한 달 남기고 경쟁국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한국이 사우디의 손을 들어준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팀이건, 두 팀이건, 민·관의 '적극적인' 유치 활동의 총합이 지난 28일 BIE 총회에서 거둔 '29표'이다.
처음부터 스텝이 꼬였다면, 다른 '코리아 원팀'의 성과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엑스포를 놓쳤더라도, 건설 사업이라도 듬뿍 수주했다면 적어도 한 마리 토끼는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원희룡 장관이 있다. 국토부의 '장관동정'을 보면, 올들어 칼리드 왈팔레 사우디 투자부 장관과 1월 18일(다보스 포럼)과 10월 14일(서울 조찬간담회) 만나면서 인프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5월 서울 한·사우디 모빌리티·혁신 로드쇼를 열어 사우디 교통물류부와 협력을 다짐했다. 지난 6월엔 사우디를 방문, 에너지부 및 도시농촌주택부 장관 등과 만나 '원팀 코리아' 지원활동을 펼쳤다.
원 장관은 역대 어느 장관보다 해외 영업을 많이 했다. 우크라이나와 아랍에미리트(UAE), 인도네시아, 르완다, 카타르, 싱가포르, 레바논 측과 접촉했다. 가히 건설 업계의 '1호 영업사원'이라 할 만하다. 물론 사우디가 가장 중요한 영업활동 무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일까. 오일달러 특수는 없었다.
29일 해외건설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건설업계는 올 1~10월 총 256억 4603만 달러의 수주액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시기의 247억 4804만 달러보다 약간 늘었지만, 민·관 '코리아 원팀'이 상반기 목표했던 350억 달러의 70%에 머물렀다. 사우디 건설 수주액은 62억 5705만 달러로 작년 동기(30억 달러) 대비 2배 정도 늘었다. 이데일리가 전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지난해 빈 살만 왕세자 방한 이후 네옴시티 수주에 기대가 커졌지만, 실제 본 계약을 체결한 건설사는 많지 않았다."
물론 연말 계약 물량이 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2030년까지 단계별로 쪼개어 발주하는 네옴시티 공사를 더 수주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통령실이 적극 홍보했던 용산의 '1호 영업사원'과 국토부 '1호 영업사원'의 실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61조 원의 경제효과와 50만 개의 일자리,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로 우리가 놓친 기회다. 잃은건 명확한 데 얻은 게 흐릿하다.
BIE 투표에서 사우디에 표를 던진 119개국이 아니라 바로 대한민국이 '오일달러'에 현혹됐던 건 아닐까. 아라비아 상인 정신으로 무장한 빈 살만에 당한 걸까. 대통령과 왕세자의 한·사우디 원팀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의문의 출발점이다.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이런 국제적인 수모를 당했던 적이 없는 나라다. 좋은 게 좋은 건 시정잡배에게나 쓸 말이다. '국가급 영업사원들'의 실적을 놓고 엄정한 '국민 감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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