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황을 중심으로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개전에서 4월까지 러시아군의 키이우 공격 시기와 4월부터 9월까지 우크라군의 남동부 전선 선전과 러시아군의 후퇴까지가 두 번째 시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월 30일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4개 주의 점령지를 병합했다. 작년 9월부터 현재까지 전선은 거의 변화가 없이 고착된 채 15개월이 지났다. 지난 6월 초 시작한 우크라군의 반격은 실패했다.
전쟁 초기 높았던 국민적 사기
개전 직후 북부와 동남부에서 공격해 온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에 키이우 함락이 임박해 보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8~60세 남성의 출국을 금지하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미국과 튀르키예 정부가 안전지대 도피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거절했다. 두 번째 시기까지 우크라 국민은 단합돼 있었다. 그러나 965㎞에 걸친 전선이 1차 대전 때처럼 진지전과 포격전으로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개전 두 번째 겨울이 찾아오면서 국민적 사기는 떨어지고 있다. 우크라 국민에게 전쟁은 무엇이고, 그들은 어떤 희망을 걸고 있나.
우크라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라줌코프(Razumkov) 센터가 지난 7월 27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2.1%는 국가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잘못된 방향이란 답은 26.8%였다. 현존하는 문제와 어려움을 언제 극복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향후 몇 년 내가 42.7%, 훨씬 더 먼 미래가 41.7%로 84.4%가 시간이 걸려도 난국을 극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같은 기관의 올해 5월의 86.2%(43.0/43.2%)와 2~3월의 85.3%(49.4/35.9%)에 비교하면 약간 낮아졌지만, 지난해 9~10월 조사의 83.2%와 큰 차이가 없다. 전쟁 직전인 2021년 12월의 72.1%(17.7/54.4%)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이다.
군(92.6%)-국방부(74.9%)-비밀경찰(66.9%)-경찰(61.3%) 순으로 전쟁 및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도 역시 낮지 않다. 교회(58.2%), 국내 언론(55.7%), 지방정부(55.1%)보다 높았다. 흥미로운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도 변화다. 2021년 7~8월 조사에서 32.6%였다가 개전(2022년 2~3월) 직후 84.9%로 올랐다가, 올 7월에도 80.8%를 유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쟁 직전인 2022년 60%대에서 전후 80%대(러시아 레바다 센터)로 뛰어오른 것과 비슷하다. 대통령 지지율은 높지만, 정부나 기관에 대한 지지가 낮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우크라 국민은 비슷한 정서가 있다.
지난 1월 대통령 보좌관에서 사퇴한 뒤 젤렌스키 비판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올렉시우 아레스토비치는 신뢰율이 19.4%(불신율 65.4%)에 불과했다. 이 정도 지지율이면 내년 3월 예정대로 대선을 치러도 젤렌스키의 압승이 예상된다.
군과 국방부,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는 전쟁을 감내할 국민적 자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크라 중앙 정부와 의회, 정당, 은행 등 정치, 경제, 사회, 법적 제도에 대한 신뢰는 바닥 수준이다.
젤렌스키 내년 3월 대선해도 당선 무방
정부 39.1%, 의회 36.2%, 정당 17.0%, 중앙은행 48.4%, 상업은행 30.7%, 노동조합 25.3%, 검찰 27.8%, 사법부 19.0%였다. 의회 인권 특위 역시 41.8%의 응답자만 신뢰를 표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인권과 의회,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쟁 이후 부문별로 10% 정도 개선된 게 이 정도다.
국민적 불만은 우크라의 고질적인 부패 문제에 집약된다. 국가반부패사무소(NABU) 28.8%, 반부패 특별검찰 27.7%로 반부패 당국에 대한 불신이 이를 말해준다.
젤렌스키가 군과 국방부를 동원해 전쟁을 계속한다면 불가능하지 않은 국민적 지지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KIIS)의 지난 6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83.5%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휴전은 안 된다고 답했다. 우크라 국민이 막연하나마 미래에 희망을 품을 자생적인 근거는 거의 없다. 산업기반이 파괴돼 경제는 전쟁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인구도 줄었다.
우크라 미래연구소(UIF)의 지난 5월 인구통계 발표에 따르면, 현재 인구는 2900만 명으로 이 가운데 경제활동인구는 1200만 명에 불과하고, 이 중 250만~290만 명이 실업 상태다. 전쟁 전 인구 3760만 명 중 해외로 도피한 2000만 명 중 1200만 명만 귀국했다. 국내 실향민도 500만 명이다. 전선에 내보낼 병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교수는 지난달 26일 유튜브 삼프로 강연에서 볼로디미르 파니오토 KIIS 소장의 말을 인용해 "최악의 경우 우크라는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된다. 영토냐, 사람이냐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1300만 명 해외·국내 실향민
희망의 양대 근거는 미국과 서방의 계속된 지원과 유럽연합(EU) 가입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을 위협하는 것은 러시아군이 아니다. 뿌리 깊은 부패다.
지난 1월 대통령실 부실장을 비롯해 국방부, 법무부, 인프라부 차관이 부패 문제로 경질됐다. 8개월 뒤 국방장관도 경질됐다. 지난 5월에는 대법원장이 체포돼 수사를 받고 있다. 2019년 대선에서 반부패 공약을 들고 지지를 받은 젤렌스키의 권력 기반을 한순간에 허물 정도로 난리 중에도 고위 공무원들의 횡령과 뇌물, 착복이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부패감시단체 국제투명성기구(TI)의 2022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180개국 가운데 116위로 유럽 최하위권이었다.
부패는 우크라의 전쟁 수행 능력과 함께 서방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막대한 군사 및 예산 지원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투명한 검증이 안 되는 한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 공화당이 연방하원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의 우크라 지원예산안을 저지하고 있는 명분이다. 백악관이 10월 20일 제출한 우크라 지원 예산 614억 달러는 하원에 계류돼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4일 브리핑에서 "예산이 바닥났다"고 호소했다. 백악관은 "의회 조치가 없다면 연말까지 우크라에 무기와 장비를 보낼 재원이 바닥난다"면서 협조를 요청했지만, 공화당은 흘려듣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10월 초 시작된 가자지구 사태 이후 우크라는 '잊힌 전쟁'이 되어가는 판국이다.
공화당이 반대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 미 국무부가 8월 29일 공개한 우크라 통합국가전략(ICS)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우크라 정치, 경제 엘리트들의 만연한 부패는 국민적 신뢰와 서방 국가 지도자들의 신뢰를 모두 흔드는 '진정한 위협'이라고 지목했다. 올리가르히(과두 재벌)가 지배하는 금융과 에너지, 광산 부문의 민영화와 탈집중화 개혁안을 제시했다. 2000명의 판사를 새로 뽑아 9000여 건의 사법 피해 건을 처리할 것도 권고했다. EU가 오는 14~15일 브뤼셀 정상회의에서 결정하는 우크라의 가입 절차 착수 여부에도 부패는 결정적인 관건이다.
EU, 연내 우크라 가입협상 개시 결정
집행위는 11월 8일 보고서에서 "우크라는 EU가 요구한 7가지 개혁 중 4가지를 완수했다"면서 "가입 협상 전까지 3가지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데어 라이언 EU 집행위원장은 같은 날 "90%의 준비가 완료됐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빨라야 내년 3월 가입 협상이 시작된다고 해도 우크라가 정치, 경제, 사법 등의 부문에서 EU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려면 최소 몇 년이 걸린다.
국민 10명 중 9명 이상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을 지지하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사회엔 부패가 만연, 전시경제를 뒷받침해 온 서방 지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취업 중인 노동인구는 1000만 명이 되지 않는다. 궁극의 희망인 EU 가입은 여전히 하세월이다. 전쟁은커녕 경제와 사회는 물론, 국가적인 거버넌스(지배 체계)가 흔들린다. 전쟁 22개월째, 우크라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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