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블라디미르 푸틴의 승리를 두고 볼 건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워싱턴을 찾아 의회 계류 중인 우크라 지원 예산 통과를 직접 호소하고 나섰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10월 20일 의회 제출한 1100억 달러의 안보 패키지 예산 중 614억 달러의 우크라 지원분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푸틴에 성탄선물 줄 수없다"
바이든 행정부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펀딩 전략은 우크라의 패배를 부각하는 대신, 역으로 '러시아의 승리' 가능성을 한껏 강조해 미국민의 반러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다. "푸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길 수 있겠느냐"는 존 커비 백악관 전략소통조정관의 말로 요약된다.
'버티며 건설하기' 전략
젤렌스키의 방미는 미국이 준비하는 또 다른 계획과도 관련돼 있다. 2024년 이후 우크라 전쟁을 어떻게 끌고 나갈지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다. 정확히 말하면 우크라의 구상이 아니라,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구상이다. 지난해 2월 24일 침공 이후 며칠 내로 키이우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됐던 러시아는 패퇴했다. 그러나 실패에서 다시 일어섰다. 전열을 정비하고, 더 넉넉한 전쟁자금으로 더 강력한 무기를 더 많이 생산하고 있다.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 군 총사령관의 진단처럼 교착상태가 장기화한다면 러시아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돈도, 무기도 없으면서 앞서가려는 건 우크라 측이다. 뉴욕타임스가 11일 미국과 우크라 당국자들을 취재한 결과 내놓은 중간 결론이다. 여전히 공격 위주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미국은 현 영토를 방어하면서 무기 생산력을 확충, 장기적으로 내다볼 것을 권한다. 이름하여 '버티며 건설하기(hold & build) 전략'이다. 젤렌스키를 비롯한 우크라 지도부는 미국의 전비 지원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미국 측의 평가다. 당장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확보하지 못한 수백만 발의 포탄을 지원해달라는 등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미국은 더 긴축된 예산으로 더 잘 싸우라는 주문이다. 러시아가 위협을 느껴 2024년 말이나 2025년 초 협상에 나오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라는 말이다. 일종의 '출구 전략'이다.
우크라는 지난 9월 크림반도나 흑해함대 공격처럼 상징적인 승리를 노리고 있다. 국제사회의 지원 여론을 조성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미국은 전략 변화가 없다면 2024년은 '1916년'의 재연이 될 것으로 본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음에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해이다. 우크라는 공식 사망자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병원마다 다친 병사들로 가득 차 있다. 미국 당국자들이 우크라 측에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의회 예산안이 어떻게 처리되건, 미국이 지난 2년 동안 제공한 것과 같은 지원은 베풀 수 없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미국은 그동안 살상무기의 수준을 높여 제공하면서 우크라의 승리를 독려했지만, 이제 우크라가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라는 말이다. 우크라가 능력이 있는지는 덜 중요하다.
우크라 "공격하겠다" 미국 "기다려라"
미국은 지난 2년 동안 우크라 군수 및 예산지원으로 1110억 달러를 투입했다. 젤렌스키가 각국 의회를 돌며 연설만 하면, 막대한 지원금이 쏟아졌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젤렌스키가 지난해 11월 19일 워싱턴의 핼리팩스 국제안보포럼에서 평화 협상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발표한 '평화 공식'은 빛바랠 수밖에 없다. 크림반도를 포함, 1991년 독립 당시의 영토 100% 복원(5항)과 민간인 학살 책임자의 전쟁범죄 단죄(7항) 등 10개 항이다. 미국을 필두로 우크라에 군수지원을 해 온 50개국이 대부분 지지해 온 선언이다. 7·15 키이우를 방문, 유독 재건사업에 관심을 많이 보인 동아시아 분단국의 '1호 영업사원'도 공개적으로 지지한 선언이다.
미국과 서방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더 싸우라"고 독려하지만, 역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지원을 줄이거나, 거둬들인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셈법을 정말 몰랐다면, 젤렌스키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크라의 최종 상태는 무엇일까. 강대국은 늘 계획이 있다. 지난 가을부터 본격화된 논의의 한 갈래는 우크라를 '유럽의 무기고'로 만드는 것이다.
서방의 계속되는 무기 지원과 지원받은 무기·장비의 수리에 치중했던 흐름이 바뀐 것은 지난 9월이다. 바이든과 젤렌스키는 워싱턴에서 "우크라와 모든 파트너국을 강화할 새로운 방위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동의했다." 같은 달 30일 우크라 정부가 키이우에서 주최한 국제방산컨퍼런스 개막 연설에서 젤렌스키가 소개한 말이다.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 국방장관은 우크라군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장비를 가능한 한 생산해야 한다면서 궁극적으로는 "세계 수준의 군사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미국과 나토 회원국들이 황금알을 낳는 첨단무기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할 리 만무할 터. 러시아 침공 이후 미국과 나토가 계속 겪어온 탄약과 포탄, 대 탱크 미사일 등 기본적인 재래식 무기 확보를 위해 고안한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무색해질 젤렌스키의 '평화 공식'
우크라 전쟁은 나토가 방위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하게 계기이기도 했다. 세계화의 광풍 속에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제조업 기반을 상당 부분 없앤 탓에 쉽사리 복원하지 못하는 문제임이 드러났다. 나토가 7·11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발표한 정상회의 코뮈니케 36항은 우선 지상군용 탄약·포탄을 중심으로 역내 방위산업의 육성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크라군의 반격전이 성과를 내지 못하던 시점, 결국 우크라가 필요한 무기를 우크라에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이 기회에 여전히 옛소련식인 우크라 무기체계를 나토식으로 바꾸는 한편, 기로에 처한 우크라 경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내보이고 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지난 6일 미·우크라 정부가 워싱턴에서 공동 개최한 '우크라 방위산업 기반 회의' 기조연설에서 러시아 공격에 대처할 장기적인 능력의 강화를 주문하며 우크라 방위산업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방산기업들은 물론 동맹과 우방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 정부가 공개한 '군사산업컴플렉스(MIC) 개발안'에 따르면 우크라 방위산업은 300개의 국영기업·기관이 25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전쟁 전 이야기다. 불행히도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돈바스 지방 도네츠크가 철강 및 방위산업 중심지였다. 문제는 러시아 역시 나토의 이러한 움직임을 꿰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 미사일 공격 탓에 병사 훈련장조차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잘루즈니 우크라군 총사령관)”에 러시아가 우크라의 무기공장 건설을 지켜만 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우크라가 생산력을 갖출 때까지 나토는 한국산 포탄이 여전히 필요하다.
한국산 포탄 우회전달은 계속될 듯
지난봄까지만 해도 우크라군이 서방이 추가 지원한 탱크와 장거리미사일 등으로 반격에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미국과 나토는 이제는 우크라에 무기·포탄 공장을 더 짓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각국의 국내 정치 요인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지원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러시아에 쉬운 승전을 허용하지 않으려면 우크라를 재래식 무기 제조창으로 만들 수밖에 없게 됐다. 산업기반이 붕괴한 우크라에선 역설적으로 무기·탄약 공장이 일자리 창출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필 무기와 포탄 공장에서나 일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딱하다.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는 최전방(frontline) 국가를 자처한 우크라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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