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크라에 제공한 안보지원의 90%는 이곳, 미국에서, 미국 제조업자들과 미국 생산에 지출됐다. 더 많은 미국 일자리를 만들었고, 미국 경제의 성장에 기여했다. 서로에게 상호이익(win-win)이었던 만큼 계속 지원할 필요가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비용 대비 가치도 거론했으면 한다. 미국 국방예산을 10% 정도 올림으로써 용감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전쟁 전 군사력의 거의 절반을 파괴했다. 단 한 명의 미국인도 희생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교장관)
미·영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
프랑스와 독일도 나름 역할을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사동맹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미국과 영국이다. '동맹 속 동맹'이다. 미국 상원이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제출한 우크라이나 지원예산안 표결을 저지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가자지구의 즉각적인 휴전 논의를 독려했지만 무위로 그쳤다.
우크라 전쟁과 가자지구 사태가 모두 녹록잖은 도전에 직면한 순간, 미-영 외교장관이 머리를 맞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7일 양자 회담을 갖고 국무부 딘 에치슨 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했다. 미·영 외교 수장은 모처럼 속내를 내보였다. 회견의 초점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가자지구 사태에 모아졌다. 이스라엘군의 고의성 짙은 공격으로 희생된 저널리스트들의 문제도 거론됐다. '동료의 피'를 본 탓인지 기자들의 질문엔 유독 날이 서 있었다.
블링컨 장관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악명높은 (미·영) 특별관계가 지금보다 중요했던 적은 없다"면서 글로벌 현안에서 미·영이 보조를 맞추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어 우크라 지원 문제를 거론했다. "2년 동안 미국은 700억 달러(92조 2000억 원) 이상을, 유럽 동맹국들은 1100억 달러 이상을 각각 지원해 왔다"면서, "고통 분담의 완벽한 사례"라고 자평했다. 영국은 2022~2023년 회계연도에 23억 파운드(3조 8000억 원)를 지원, 미국 다음으로 지원액이 많았다.
"러시아는 1930년대 나치독일"
블링컨과 캐머런은 개전 2년 가까이 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우크라 전쟁을 '놀라운 성공'으로 평가했다. 성공은 대부분 러시아가 상당한 군사력을 잃은 전쟁 초기에 집중돼 있다. 블링컨이 우크라 안보지원이 결국 미국민의 호주머니로 환수된다는 말을 한 것은 미 상원의 표결 저지로 우크라 지원 예산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것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
서두에 소개한 블링컨과 캐머런의 말에는 돈의 규모와 그 효과를 말할 뿐 최일선에 내몰려,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 군인들과 다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주민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어차피 지원액의 90%를 미국 경제가 환수하는 만큼 더 많은 무기를 보내 러시아에 더 큰 피해를 주라고 우크라 국민에 주문하는 셈이다. 캐머런은 '미국이 우크라 지원을 줄이면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이 지원을 늘릴 것이냐'는 질문(WSJ)에 "미 의회가 결국 통과시킬 것"이라고 낙관하며 "(통과가 안된다면)우크라의 사기와 유럽 국가의 지원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역시 2024~2025년도 우크라 지원 예산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장관은 우크라 때문에 워싱턴을 방문했다고 했는데 610억 달러의 우크라 지원안은 미국 납세자의 돈이다. 미 국내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이냐'는 BBC의 도발적 질문에 "나는 미국의 친구이자, 우크라의 친구로 왔을 뿐 미국 선거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라면서 유럽이 1930년대 나치독일을 제때 대처하지 못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동맹을 돕고, 끔찍한 침공을 중단시키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끝에 미 국방예산 10% 증액이 가져온 효과를 강조했다.
캐머런이 2차대전 역사를 들먹인 건 난센스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은 독일의 안보를 먼저 위협하지 않았지만, 2008년부터 우크라의 나토 가입 절차를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안보를 먼저 위협했기 때문이다.
'가자사태 이후'엔 임시정부 수립
가자지구 사태에 대해 블링컨은 "우리(미·영)는 이스라엘이 효과적인 자위를 확보해 10·7 하마스 공격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강력 지지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눈길을 끈 건 '가자지구 사태 이후'와 관련한 미·영의 논의 내용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뜻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하마스를 배제하고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을 행정주체로 내세워 왔다. 문제는 가자주민들이 그동안 민주적 선거를 통해 PA가 아닌, 하마스를 선택해 왔다는 점이다.
블링컨은 "요르단강 서안과 연결,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권리가 전면 인정돼야 하며, 이를 위해 두 국가 해법이 최선의 길이다"라는 기존 입장을 밝힌 뒤 그러나 당장은 안보와 거버넌스(통치체계), 재건 문제를 맞닥뜨려야한다"고 말했다. 향후 며칠 몇 주 동안 미·영이 집중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덧붙였다. 캐머런도 '가자지구 선거에서 주민이 PA를 받아들이겠느냐‘는 질문에 "선거보다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임시정부 구성이 먼저 돼야 할 것"이라며 예봉을 피했다. 가자지구 주민의 민의를 우회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언론인 피해 늘며 날선 기자들
블링컨과 캐머런이 모두 진땀을 빼야 했던 질문은 이스라엘군의 직접 공격으로 사망한 언론인 문제였다. 10·7 가자지구 사태 이후 이스라엘 안팎에서 사망한 언론인은 60여 명.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는 특히 7일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언론인 1명이 죽고, 6명이 다친 사건은 이스라엘군의 의도적인 공격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엄정한 조사를 촉구했다. 블링컨과 캐머런은 언론인의 희생에 장황하게 애도를 표하며 이스라엘 측의 조사를 기다려 보자며 얼버무렸다.
우크라 전쟁과 가자지구 사태. 저무는 2023년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두 개의 글로벌 이슈에 가장 깊숙이 개입해 온 미·영 외교장관의 셈법을 확인할 수 있는 회견문이었다. 두 사안 모두에서 현지 사람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영국 총리(2010~2016)를 지낸 캐머런은 지난달 13일 외교장관으로 보수당 내각에 복귀했다. 이날 회견에선 "외교장관이 되기 위해 6년 동안 총리직을 견습삼아 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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