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테흐스(유엔 사무총장)의 재임이 세계 평화에 위험이다. 그가 가자지구 휴전을 위해 유엔헌장 99조를 발동한 것은 하마스 테러리스트 조직에 대한 지지인 동시에 노인 살해와 아기 납치 및 여성 강간을 승인하는 것이다. 누구든 세계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자지구를 하마스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지지해야 한다."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 입국비자도 취소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교장관이 7일 엑스 계정에 올린 글이다. 가장 높은 권좌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자의 말본새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누구도 이스라엘에 이러한 권능을 부여한 적이 없다.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 행사를 두고 회원국의 일개 장관이 '세계평화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로 규정했다. 이스라엘이 연거푸 모독하는 대상은 유엔 사무총장 개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192개 회원국에 대한 모독이고, 국제사회에 대한 부정이며, 무엇보다 유엔 헌장에 대한 명백한 거부다.
이 난리를 치고도 구테흐스 총장이 소집한 8일 안보리 특별회의에서조차 즉각적인 휴전을 담은 아랍권의 결의안이 부결됐다. 또 다시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랍 에미리트(UAE)와 이슬람국가협력기구(OIC)가 작성한 초안에 하마스의 10·7 공격을 비난하는 문장을 넣으려다가 실패하자 휴전이 하마스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유엔이) 더 이상 가자지구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구테흐스가 요구한 즉각적인 휴전은 다시 공염불이 됐다.
미국 안보리 결의안 표결에 또 개입
앞서 이스라엘 외교부는 6일 린 해스팅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의 입국비자를 취소했다. 코헨은 이날도 엑스 계정에 "1200명의 이스라엘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하마스를 규탄하지 않고, 국민을 보호하는 민주국가인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사람은 유엔에 근무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에 입국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날렸다. 해스팅은 유엔이 임명한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영토 담당 조정관으로 현지에 상주해왔다. 이스라엘군의 공격 이후에는 가자주민 110만 명을 보호하고 있는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업무를 감독하고 있다.
코헨 장관과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는 하필 '유엔의 날'이었던 10월 24일에도 유엔 정신에 침을 뱉었었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국제 인도주의 법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발언을 문제 삼아 일개 대사가 사무총장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다. 하마스가 가자 주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파이지만,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무력을 동원해 온 건 맞다. 팔레스타인 땅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을 추구한다. 하지만 지금은 '선 주민 보호, 후 하마스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코헨은 이날 안보리 회의에서 "10·7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비례적 대응'은 생존 문제"라며 구테흐스와 당일 예정됐던 면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코헨과 에르단은 하마스를 사갈시하기 위해 전혀 성격이 다른 '나치'와 '이슬람국가(IS)'에 비유했다. 이 정도 되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격리할 대상은 사무총장이 아니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 극우 포퓰리즘 정권이다.
극우정권 등장 때마다 반복된 이스라엘의 반유엔 행동
이스라엘의 반유엔, 반유엔 행태는 극우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반복됐다. 독립 두 달 전인 1948년 3월 5일 팔레스타인 주민의 현황을 보고하라는 안보리 결의 42호에서부터 이번 사태가 벌어진 뒤 인도주의 휴전 및 구호물 수송 통로를 만들라는, 11월 15일 자 결의 2712호까지 188개의 결의의 대부분을 무시해 온 국가다. 안보리가 1990년대 초부터 북한의 핵-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내놓은 규탄 및 제재 결의는 22개. 이스라엘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안보리 행동으로만 보면, 진작부터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야 했던 국가는 북한이 아닌, 이스라엘이다.
21세기 이후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안보 제재 중 일부 내용을 훑어보면 이렇다. 결의 1322호(2000-10-7)는 아리엘 샤론 총리의 예루살렘 템플 마운트 방문과 이로 인한 폭력사태를 규탄했고, 1397호(2002-3-12)는 사상 처음을 두 국가 해법을 명시적으로 촉구했다. 1435호(2002-9-24)는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 안팎에 대해 이스라엘이 취한 조치를 취소하고, 군병력을 2000년 9월 위치로 후퇴시키라고 촉구했다. 1860호(2009-1-9)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중단을, 2334호(2016-12-23)는 유대인 정착촌 건설의 중단을 각각 촉구했다.
이스라엘은 안보리의 여러 차례 중단 결의에도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점령지에 총 240여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런 나라가 유엔의 정통성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가자지구 사태 이후 두 달 동안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공격의 생생한 장면과 유엔에 보여 온 오만한 행태는 세계 시민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유엔의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큰소리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는 이번에도 여러 차례 입증됐듯이 미국의 뒷배 덕분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내외 여론이 악화하자 7일 네타냐후에게 민간인 보호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제스처에 그쳤다. 되레 143억 달러의 이스라엘 추가 군사지원 예산안의 의회 통과를 위해 애면글면하고 있다.
휴전 결의안이 무산됐지만, 유엔 헌장 99조는 사무총장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가자지구는 세계 최대 '노천 감옥'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정확한 비유가 아니다. 이스라엘 정규군이 병원과 학교, 난민촌을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는 세계 최대의 학살장이 됐다. 국가가 국민 또는 점령지 주민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탄압과 학살을 하는 데 대해 국제사회는 21세기 들어 국민보호의무(R2P)에 합의한 바 있다. 유엔 총회와 2005년 유엔 세계 정상회의(World Summit)가 승인한 독트린이다. 대량 학살과 인권 유린에 처한 모든 주민의 보호를 국제사회의 책임으로 규정했다.
R2P는 세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우선 개별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Pillar I)과 국가 간에 주민보호책임을 다하도록 서로 도울 것을 다짐하고 (Pillar II), 마지막으로 '적시에 결정적인 집단행동'을 취할 것(Pillar III)을 합의했다. 집단행동은 "어떤 국가이건 명시적으로 보호책임에 실패하면 다른 나라들(states)이 주민 보호를 위한 집단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2011년 유엔 안보리가 리비아 사태에 내린 결정이 첫 이행 사례다. 안보리는 무아마르 가다피 정권의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허용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공습을 감행했다. 리비아 주권 침해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R2P의 성공적인 이행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전쟁을 빌미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국제형사재판소(ICC) 소관 업무이기도 하다. ICC는 지난 3월 17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범죄 혐의를 걸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태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비하면 몇 배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데 그치지 않고 구테흐스의 99조 동원에 "하마스의 노인 살해와 아기 납치, 여성 강간을 승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코헨 스스로 안보리에서 주장했던 '비례 대응'은 더 이상 비례도, 자위권도 아니다. 가자지구 주민 희생자는 하마스 공격으로 인한 이스라엘 사망자 1200명의 15배에 육박하고, 230만 주민의 80%는 난민이 됐다. 세계 시민이 목도하고 있는데도 ICC가 이스라엘 정부와 하마스 책임자를 기소하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안전과 고향 복귀, 유대인 정착촌 건설 중단 등을 요구해온 188개의 안보리 결의가 왜 비난과 규탄, 촉구에 그쳤겠는가. 이번처럼 미국이 '손'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이미 합의한 수단과 제도를 외면하고 인도적 재앙을 걱정하는 데 그친다면 그렇지 않아도 빛 바랜 유엔 헌장에 명토박힌 정신은 더욱 무색해진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만족할 때까지 가자지구 사태를 방관할 게 분명하다. 가자지구 사태가 매일 매일 입증한 것은 국제사회가 어떠한 거버넌스도 없이 무정부 상황에 던져져 있다는 점이다. 세계 시민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유엔과 국제사회의 정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갈수록 막연해진다. 어쩌면 초중등 교과서에 국제사회의 정의와 인권 대신, '이중 잣대'와 이스라엘의 '특수 지위'를 담는 게 현실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인권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교육도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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