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돌이킬 수 없는 탈선을 하는 것인가." 미 CNN 방송 '파리드 자카리아의 GPS'팀이 12일 보내온 이메일 뉴스레터가 던진 질문이다. 가자지구 사태는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소수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자카리아의 GPS는 내비게이션이자 글로벌 광장(Global Public Square)의 약자다.
가자지구 안보리 휴전안 '14 대 1'
지난 8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비상대권으로 소집된 안보리 특별회의에서 조 바이든의 미국은 즉각 휴전안에 유일하게 비토했다. 찬성 13표와 기권 1(영국)표를 던진 14개국과 동떨어져 외로운 하나(1)가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 위기, 북핵 위기 등 동시 진행되는 세 개의 위기에서 핵보유국을 마주하고 있다. 국내 민주주의 역시 도널드 트럼프가 연출한 의사당 폭동의 잔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되레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부강(富强)의 절정에 있다.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서유럽 및 일본 위에 있고, 군사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 우위이다. 세계 10대 기업의 9개가 미국 기업이다. 1989년에는 4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리더십은커녕 이단아가 되고 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자카리아는 '자기 회의에 빠진 슈퍼파워' 제목의 12일 자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미국민 사이에 확산되는 비관주의를 짚었다. 주요 여론조사 결과에 반영된 미국민의 정서는 최악이다. 국가가 나아가는 방향과 경제, 세계에서의 역할 등 모든 부분에서 후진하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8년 조사에서 '2050년 미국은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4%는 경제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답했다. 60%는 미국이 세계에서 덜 중요한 국가가 될 거라고 답했다.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갤럽 장기 조사에서 미국의 국가 방향에 만족하는 응답자는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최근 20%로 곤두박질했다.
무엇보다 트럼프와 바이든 시대 대외정책에 대한 자기 회의가 짙어졌다. 자카리아는 "트럼프와 바이든 대외정책 접근의 가장 큰 결함은 각각 비슷한 비관적 전망에서 비롯돼 서로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바이든은 모두 미국이 스스로 구축한 국제경제 시스템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됐다고 가정한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이 개방된 시장과 자유무역의 세계에서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성난 거인'도 위험하지만, '겁먹은 거인'은 더 위험하다.
미국민 "국가 방향에 만족한다" 20%
미국 유권자들은 2016년 대선에서 희망과 낙관을 제시하는 후보 대신, 사상 처음으로 파멸과 어둠을 내세운 트럼프를 선택했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가 암울한 상태"라면서 "미국은 존중받지 못하고, 조롱의 대상이 됐으며, 찢겨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취임사에서는 '미국의 대학살(American carnage)'이라고 표현했다. 트럼프는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공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트럼프가 내년 대선 출마 전에 내놓은 홍보 비디오의 제목이 '추락하는 국가'였다. 바이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메시지를 내놓는다.
바이든 시대 대외전략 및 경제전략을 집약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지난 4월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문을 보자. 설리번 역시 세계화와 경제 자유화가 미국 일자리를 빼앗아 산업 생태계를 공동화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여전히 최강의 슈퍼파워이지만, 가장 중요한 근육의 일부가 위축됐다"면서 세계는 이제 미국의 번영에 복무하라고 다그쳤다. 공급망의 위험을 거론하며 대만 TSMC와 삼성 등 동맹과 우방의 공장을 미국으로 유치했다.
비관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가장 걱정스러운 도전은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이 아닌 미국에서 오고 있다." 스스로 쇠망하고 있다는, 과장된 걱정은 세계적 이슈에서 미국의 주도적 역할을 후퇴시킴으로써 '힘의 진공상태'를 야기한다. 여러 강대국과 행위자에게 발을 들여놓게 하는 진공이다. 우리는 '미국 이후의 중동'이 어떤 것임을 목도해 왔고,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지역 강국이 아닌, 강대국들과 엮임으로써 지구 차원의 결과를 낳고 있다.
브릭스 플러스? '미국 플러스'가 세계 GDP 60%
자카리아는 우크라 지원 예산을 반대하는 공화당을 두고 193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질타했다. 유럽과 아시아가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불타던 상황에 공화당이 고립주의를 고집했던 것을 말한다. 미국은 193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수입 관세를 부과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자카리아의 미국 진단은 애정이 어린 시선을 전제로 한다. 고립주의가 아닌, 적극적 국제주의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당위도 담겨 있다. 그는 국내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만이 현 국제 시스템을 유지할 능력이 있고, 중심 역할을 할 위치에 있다고 주장한다.
'브릭스(BRICS) 플러스'와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을 이야기하지만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및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서방 플러스' 국가들은 여전히 전 세계 GDP의 60%와 국방예산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신념을 잃지 않는 한, 현 국제질서는 앞으로 수십 년 더 번성할 수 있다"는 게 자카리아의 궁극적인 낙관론이다.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과정에 소개한 팩트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생각의 집'을 짓는 데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중도' 자처하는 인도계 무슬림 미국인
다음 달 환갑이 되는 자카리아는 인도 뭄바이 태생의 무슬림이다. 예일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공공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치평론가 겸 언론인이다. <자유의 미래(The Future of Freedom)> <미국 이후의 세계(The Post-American World)> 등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뉴욕타임스, 포린어페어스의 기고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중도'로 표방하지만, 평가하는 이들에 따라 정치적 리버럴, 보수주의자, 중도 온건파, 과격한 중도주의자 등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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