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길은 새 길을 뚫게 하고, 새로운 교역로는 새로운 지정학적 상황을 만든다. 가자지구 사태 와중에 러시아가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북극 항로(NSR)가 관심을 끌고 있다. 예멘 친이란 후티 반군의 미사일, 드론 공격으로 홍해의 안전이 위협받으면서 시작된 일이다.
후티반군 미사일·드론 공격 15차례
23일 중동지역을 관장하는 미국 중부군 사령부에 따르면 홍해의 민간 선박을 겨냥한 후티 반군의 공격이 모두 15차례가 있었다. 아이젠하워 항모전단의 전함이 순찰하고 있지만 반군의 공격을 근절하기는 녹록지 않다.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표방하고 있는 후티 반군은 24일 성명에서 "미국과 동맹의 괴롭힘이 계속된다면 홍해는 불타는 싸움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내각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격과 이를 지지하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노선이 엉뚱하게 세계 경제에 암운을 드리우는 것이다. 무력으로 생긴 문제를 더 큰 무력으로 막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이날 홍해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동맹과 우방국들과 함께 다국적 '153 신속대응팀'을 구성, '번영의 수호자 작전(OPG)'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영국과 바레인,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세이셸 군도 및 스페인이 홍해와 아덴만의 안전을 위한 작전에 일차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동맹과 우방이 참여하는 건 아니다.
해양수산부도 희망봉 우회 권고
당장 호주가 "무력시위보다 외교가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도 이란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불참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불참 표명 국가는 8개국에 이른다. 모하마드 레자 아쉬티아니 이란 국방장관은 지난 14일 자국에 인접한 홍해에서 다국적 함대의 활동에 반대하면서 "이들 국가들이 비이성적 움직임을 보인다면, 놀라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국 선박들도 비상이 걸렸다. 해양수산부는 21일 우리 선박과 선원의 안전에 우려를 표명하며 아프리카 희망봉 우회 운항을 권고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같은 날 "국익과 국가 위상 등을 고려해 검토할 것"이라고 말해 해군 청해부대의 파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란틱 카운슬에 따르면 시장점유율 기준 세계 10대 선박업체 중 7개가 홍해 항로 운항을 잠정 중단했다. 영국의 다국적 석유 기업 BP는 18일 "안보 상황 악화"를 이유로 유조선과 액화천연가스(LNG)선의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 이용 중단을 발표했다. 20일 CNBC 방송은 이날 현재 희망봉 항로에 121개의 컨테이너선이 운항 중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리아 노보스티 22일 보도에 따르면 가자지구 사태 이후 두 달 동안 홍해 항로 운송량은 30%가 준 것으로 추산된다.
홍해 항로의 위험이 커짐에 따라 보험료도 올라갔다. 홍해 항로의 선박 보험료는 선적 물품 가치의 0.07%였지만, 12월 들어 0.5~0.7%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가디언) 유럽~아시아를 잇는 홍해 항로는 세계 교역량의 12%를 점유하며, 특히 컨테이너 물동량의 30%를 차지한다. 홍해 항로의 위협은 곧바로 휘발유와 가스 및 전자제품 등 생필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겨울철 수요가 많은 가스 가격은 10~13%가 올랐다. 희망봉 우회 항로 역시 막대한 추가 비용을 초래한다. 홍해 항로에 비해 8000㎞(14~15일)가 더 길고 오래 걸린다. 운송 지연에 따른 피해도 심각하지만, 선박 연료비만 항해 당 15%(100만 달러)가 더 든다.
희망봉 항로 8000㎞(14~15일) 더 길어
가자지구 사태의 부수적 피해는 엉뚱하게 러시아에 망외의 기대를 낳고 있다. 지난해부터 국가적 역량을 투입해 개발하고 있는 북극 항로가 주목받고 있어서다. 북극 항로의 장점은 많다. 무르만스크~일본 항로의 경우 6000해리(1만 1000㎞)에 불과해 2만 2000㎞에 달하는 홍해 항로의 절반에 불과하다. 수에즈 운하를 통한 유럽~아시아 항해에 37일 걸리지만, 아시아 주요 항구에서 영국까지는 25일, 일본 요코하마~네덜란드 로테르담은 20일(홍해 항로 33일) 소요된다. 북극 항로는 러시아의 영해를 통과한다.
러시아는 2035년까지 35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 북극 항로를 세계 주요 교역로로 만들 계획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월 남아공 브릭스 정상회의 화상 연설에서 러시아가 새로운 항구와 연료 터미널을 건설하는 동시에 쇄빙선 함대를 확장할 것을 자신했었다. 러시아는 내년 화물 운송량을 9260만t으로 늘린 뒤 2030년까지 1억 1000만t으로, 2035년까지는 2억 2000만t으로 늘릴 계획이다. 거리와 안전성에서 우위를 갖고 있지만 북극 항로가 최근까지 주목을 덜 받아온 이유는 얼음 때문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월 20일 대규모 쇄빙선을 건조, 내년부터는 항로의 연중 이용이 가능하도록 지시했다.
러시아 핵쇄빙선이 '게임 체인저'
북극 항로 개발의 관건은 핵 추진 엔진을 장착한 쇄빙선이다. 러시아 원자력기구 로사톰(Rosatom)은 2021년 말에서 2022년 초 핵쇄빙선 아르크티카(Artika)와 시비르(Sibir)를 처음 취역시켜 북극 항로에서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틱 조선소에서는 추가로 투입할 핵쇄빙선 건조가 계속되고 있다. 아르크티카는 3m 크기의 얼음을 부수면서 1.5~2노트 속도로 항행할 수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서방과 한국, 일본, 호주 등 '서방 플러스' 국가 50개국이 러시아에 이익이 되는 북극 항로에 곧바로 달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도 서방이나 서방 플러스 국가들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정례브리핑에서 가자지구 사태와 홍해 항로의 위험과 관련한 질문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장 짧은 거리의 북극 항로를 포함해 국제 항행 루트의 다양화가 필요하다"면서 세계 17대 항구 가운데 11개가 아시아에 있음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2040년까지 인도와 중국이 세계 경제의 40%를 점유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국가들과의 교역에도 북극 항로가 충분히 역할을 할 것임을 시사했다.
러·중, 교역로 확충에도 전략적 협력
새로운 항로는 단순히 경제적인 비용 절감 효과만 가져오지 않는다. 미국과 서방의 영향권 밖에서 경제적, 군사적 협력을 늘리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에도 부합된다. 양국은 이달 중순 동북아시아 베링해 인근 해역에서 두 번째 공동순찰 항해를 했다. 알래스카와 가까운 베링해는 북극 항로가 국제수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러-중 해군은 물론 공군의 투폴레프(Tu)-95와 H-6 등 전략폭격기도 참가해 연합훈련을 벌였다. 러시아는 지난 9월 베링해 상의 모의 적선을 격침하는 단독 미사일 사격 훈련도 벌였다.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19일 베이징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회담하고, 수교 75주년인 내년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주요 협력 분야의 하나가 북극 항로를 활용한 공급망의 확충이다. 시진핑 주석은 20일 인민대회당에서 미슈스틴 총리를 만나 "중국은 러시아 인민이 자주적으로 선택한 발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21일 글로벌 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은 가자지구 사태 이후 운송비가 비싼 희망봉 항로 대신 중국~유럽 간 고속열차(CERE)를 통한 컨테이너 운송량을 늘리고 있다. 가자지구 사태로 인한 물류대란의 위기 속에서 일대일로(BRI)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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