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제가 결국 서구의 반유대주의 유전자를 자극하고 있다. 각국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민간인 공격의 참상이 TV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민심을 자극한 결과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와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합작이다. 그 결과는 미국과 유럽의 국내 정치에 부메랑이 되고 있다.
서구 기독교 국가에서 반유대주의는 '아우슈비츠의 원죄'이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인종주의 유전자다. 10‧7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 이후 악화되는 반유대주의 움직임은 유럽에서도 극우 포퓰리즘의 자양이 된다.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가 팽배한 유럽 정치에 반이민, 인종주의의 뇌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85년 만에 찾아온 '수정의 밤'
지난 11월 3일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1930년대 나치의 유대인 습격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파괴된 묘지의 조각들이 깨져 나뒹굴고, 유대교 경전이 불탔으며, 나치의 상징 스와스티카가 벽에 부착됐다. 랍비 잉글메이어는 CNN에 "나치 시대 80여 년 만에 이곳, 유럽의 심장에서 다시 반유대주의 만행을 목격하게 된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필 '깨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 또는 '수정의 밤(Crystal Night)' 사건이 발생한 11월이었다.
빈의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오스카 도이체는 1만 2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10‧7 이후 3주 동안 167건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2022년 1년간 발생한 규모다. 지난 19일 벨기에 크라이넘의 유대인 묘지도 습격받아 많은 비석에 스와스티카가 그려졌다.
20일 미국 유대인 단체 반명예훼손동맹(ADL)의 반유대주의 사건 집계 결과, 프랑스에선 1800건이 발생(프랑스 내무부)했고, 독일에선 10월 7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 달여 동안 994건이 발생했다. 독일 민간단체 RIAS는 하루 평균 29건이 발생해, 알아크사 홍수 작전 이전에 비해 320%가 늘었다고 밝혔다. 영국 유대인 단체(CST)에 따르면 두 달여 동안 2093건의 반유대 사건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반유대주의 감시단체 CIDI는 11월 6일까지 반유대 사건이 최근 3년 한 달 평균 발생사건에 비해 818% 늘었다고 보고했다.
10월 30일 파리 안팎의 건물 벽에는 80개의 노란색 '다윗의 별'이 페인트로 그려졌다. '수정의 밤' 사건은 1938년 11월 9~10일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서 발생해 '11월의 유대인 학살(pogrom)'로도 불린다. 나치가 조직한 군중이 휩쓸고 지나간 유대인 상점과 건물, 시나고그가 파괴된 현장을 깨진 유리창으로 표현했다. 유대인 91명이 피살되고 3만여 명이 체포돼 수용소에 갇혔다. 267개의 시나고그와 7000개의 상점이 파괴됐다.
이슬람포비아 사건도 급증
가디언이 전한 유럽 각국의 반유대주의 현황과 관련한 ADL의 조사 결과 스페인 응답자의 26%가 반유대 정서를 갖고 있다. 벨기에(24%), 프랑스(17%), 독일(12%), 영국(10%), 네덜란드(6%) 순이다. 헝가리(37%)와 폴란드(35%) 등 동유럽 국가들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가자지구 사태에 앞서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반유대 정서를 자극했다. 온라인에서 활개를 치던 반유대 정서는 가자지구 사태를 계기로 오프라인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다. 유럽연합(EU) 역내의 유대인 인구는 78만 1200명. 2차 대전 직후 380만 명에서 크게 줄었다. EU 기본권국(FRA)의 2018년 보고서는 갈수록 많은 유대인이 안전한 환경을 찾아 이민을 떠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유대주의 슬로건 및 폭력 조장을 우려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금지했다. 영국 런던 경찰은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나오거나 하마스 지지를 표명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금지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내무부도 공공질서 파괴 우려를 명분으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금지했다.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도시에서는 하마스 공격을 축하하고 더 많은 폭력을 주장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자체 금지했다.
증오는 증오를 부른다. 가자지구 사태 이후 반유대주의 사건만 증가한 게 아니다.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가 팽배한 유럽 각국에서는 이슬람공포증(이슬람포비아)에서 비롯된 혐오범죄도 늘고 있다. 20일 유로뉴스에 따르면 프랑스 내 14개 모스크가 공격받았고, 프랑스 무슬림협회는 10·7 이후 위협이나 모독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십여 통 받았다고 전했다. 영국 런던 경찰국은 이슬람포비아 사건이 140% 늘어났다고 밝혔다.
인종 갈등에 기세 올리는 극우 포퓰리즘
휴먼라이츠워치(HRW)는 10월 26일 자 성명에서 가자지구 사태로 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감이 각각 높아지면서 유럽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HRW는 반유대주의 사건과 이슬람포비아 사건이 모두 늘어나면서 각국 정부가 이민정책을 동원, 아랍과 팔레스타인 출신자들이나 무슬림을 차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상, 하원은 지난 19일 극우의 주장이 상당 부분 반영된 이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HRW 성명은 "유럽 각국 정부는 모든 주민이 폭력과 차별로부터 보호받도록 조처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일부 국가의 평화적인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금지는 민주적 기본권 박탈이라고 비난했다.
반이민주의와 동전의 양면인 인종주의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출발점이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가 가자지구 사태 이후 인종주의를 부추긴다면, 유럽에선 각국 극우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기세를 올린다. 11월 22일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극우 자유당(PVV)이 하원 150석 중 37석을 차지해 원내 제1당이 됐다. 2021년 총선 당시 17석이었던 의석을 두 배 이상 늘렸다. '네덜란드의 트럼프'로 불리는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의 자유당은 강력한 반이민, 반이슬람 정당이다.
프랑스 제1야당인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는 11월 6일 하원 연설에서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이라면서 '프랑스 유대인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지 않은 장 뤽 멜랑숑의 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대표를 공격하는 소재로 삼았다.
내년 6월 유럽의회 선거가 풍향계
트럼프가 조장하는 미국 극우 포퓰리즘과 유럽 포퓰리즘은 샴쌍둥이다. 반이슬람을 표방하는 동시에 신나치 정서가 있다. 르펜이 유대인을 두둔하지만, 추종 세력의 상당수는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다. 세계화와 유럽통합에서 소외된 주민들의 불만을 끌어모아 증오와 배제의 정치를 펼친다. 지난해 대선 결선투표에서 41%를 득표한 르펜은 2027년 대선에 일찌감치 출사표를 던졌다.
내년 6월 6~9일 EU 27개국에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는 정치의 동향을 가늠할 기회다. 르펜의 RN을 비롯한 각국 극우 정당은 이번 선거를 수권정당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가자지구 사태는 유럽의 인종 갈등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는 내년 1월 체코 대선과 슬로바키아 조기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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