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상황은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김정은이 1950년 할아버지 김일성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으로 가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믿는다. 김정은이 언제 또는 어떻게 방아쇠를 당길 계획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반도는) 이미 미국과 한국, 일본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늘 경고해 온 수준을 훨씬 넘어선 위험에 처해 있다. 김정은의 최근 언행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군사적 해결을 가리킨다."
11월 초 방한 때 하지 않은 경고
결코 설익은 예측을 하지 않을, 미국의 북한 전문가 두 명이 던진 한반도 전쟁 경고다. '김정은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11일 자 워싱턴의 북한 전문 38 노스(North) 사이트 글에서다. 필자는 다름 아닌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이다. 칼린은 1974년 중앙정보국(CIA) 정보분석관으로 출발, 국무부 정보분석국 동북아 팀장으로 50년째 북한의 심중을 읽고 있다. 30여 차례 방북, 북미 대화에 참여했다. 북한 상대와 대화한 시간만 수백 시간이다. 한미 양국을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북한통이다. 헤커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거의 매년 영변 핵시설을 방문한 자타가 인정하는 북핵 최고 권위자다.
지난 11월 초 방한했을 때도 한반도 문제 해결 전망에서 절망과 좌절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전파했다. 누구보다 대북 통찰력이 깊은 그들은 왜 두 달 만에 정색하고 전쟁 경고를 하는 것일까. 전쟁 경고라는 동전의 다른 면은 결정적인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한의 대북 태세다.
"미·한은 김정은이 전쟁을 벌이지 않을 거라고 단정한다. "억제력, 억제력, 억제력"을 강조한다. 북한이 공격하면 한미의 반격으로 체제가 종말을 맞을 것임을 누구보다 김정은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다."
두 사람은 북한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견고한 증거'는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전쟁이 임박했다는 판단의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미·한의 북한 역사에 대한 오독과 북한의 전쟁 결심이 가능해진 국제 환경 변화에 대한 전략적 공감이 그것이다. 1990년 김일성이 대미관계 정상화라는 절대절명의 목표를 설정한 이후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까지 33년의 맥락을 정확히 읽으라는 건 그들의 오랜 지론이다. 이번에도 역사 톺아보기로 글을 시작했다.
절망의 끝에서 나온 결정
그 세월 동안 "북한이 대미관계 정상화 노선을 견지하기 위해 무엇을, 왜, 어떻게 노력해왔는지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2019년 이후 북한의 사고구조에서 얼마나 깊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한반도 안팎의 전략적 지형을 얼마나 본질적으로 바꿔놓았는지 읽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김정은의 전쟁 결심은 김일성, 김정일과 자신의 3대가 추구해온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지상 목표가 좌절된 뒤 정신적 충격과 아무런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는 뼈아픈 현식인식에서 출발한다. 김정은은 2019년 2월 이후 과거 전략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의 변화에 눈을 떴다. 전략 변환의 첫 신호는 2021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나왔다. (미국이 침공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한 시기다.)
칼린과 헤커는 북한은 미국의 쇠퇴를 확인하면서 러중 정상회담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난 2022년 2월 대중, 대러 관계에 전략적 노선 수정을 했다. (북한이 그해 1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보류했던 모든 행동의 재개를 선언한 것과 시기가 비슷하다.) 북중 관계는 뚜렷한 진전 신호는커녕 되레 냉각되는 조짐을 보였지만, 북러 관계는 꾸준히 발전했다. 작년 7월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북과 9월의 북러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특히 군사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두 사람은 "북한의 의사 결정은 종종 근시안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세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본다"면서 "글로벌 흐름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는 북한의 관점도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할 필요와 기회, 타이밍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년 초부터 전쟁준비 정황
여기까지는 칼린과 헤커가 지난 11월 8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한반도에서 핵재앙 예방하기'라는 주제의 강연 및 대담에서 밝힌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이번 글에서 북한이 관영매체를 통해 내보낸 신호를 읽으면서 발견한 통찰을 소개했다. 김정은 전쟁 결정의 보다 직접적인 근거다. 두 달 전 국내 강연에서는 북한의 전쟁 결정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에 따르면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는 2023년 초부터 나왔다. 북한 최고위층이 국내 소비 문제와 관련한 발표에서 정기적으로 등장했다. 한번은 김정은이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혁명전쟁을 준비하라'는 오래된 표현을 꺼내왔다. 당기관지 노동신문에는 남한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예고하는 권위 있는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칼린과 헤커가 '김정은의 전쟁 결정'을 단정하게 된 것은 지난달 30일 발표된 당중앙위 전체회의 결정서를 보고 나서다.
북한의 대남 관계 전환은 단순히 남북관계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칼린과 헤커는 남한을 북한 군사력이 공격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정당성을 부여한 신호로 읽었다. 김정은은 전체회의에서 "북남관계가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관계로 완전히 고착된 현실"이라고 못박았다.
강철 같은 동맹의 힘을 맹신하며 "억제력"를 강조하는 미국과 한국의 대북 태세에 대한 비판 역시 칼린과 헤커의 지론이다. "김정은이 전쟁을 결정한 것 같다"는 상황 인식은 비판의 칼을 더욱 벼렸다. "지난해 (북한이 내보인) 증거는 우리가 최악의 경우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판단에서다. "김정은이 미·한 동맹의 위력 앞에 발이 묶여 기껏해야 소규모 도발이나 하며 현상유지의 궤도에 머물 것이라는 믿음은 현 상황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면서 "미·한은 억제력의 최면이 걸려 있다"고 짚었다.
남북관계 전환은 전략적 결정의 증거
미·한은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운운하며 북한이 도발하면, 우리가 그 몇 배의 보복을 할 것이라고 자주 경고할수록 북한을 묶어 놓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지적이다. 백악관보다 대통령실에서 더 자주 내보내는 메시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오전 국무회의에서도 "북한이 도발해온다면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칼린과 헤커는 메아리가 반복해 울리는 '편안한 가정'의 에코룸에서 빠져나와 북한의 기습공격에 경계심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북한이 우리의 계산(예측)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과 북한 전략가들은 한미일이 빈틈없이 대비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물질적(군사력)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노릴 수 있다."
"(북한의 공격이)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더 이상 좋은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위험한 게임이라도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북한은 50~6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다. 한국과 일본 전역, 괌까지 실어보낼 수 있는 미사일 능력도 있다. 김정은이 수십 년 간 노력 끝에 미국과 대화할 방법이 없다고 확신한다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 김정은의 최근 언행은 (일관되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군사적 해결 전망을 가리킨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전쟁이 나면) 궁극적으로 미·한이 승리한다고 해도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잔해더미가 끝없이 펼쳐진, 공허한 승리가 될 것"이라면서 음울한 미래상을 제시했다. 단언컨대, 조 바이든 행정부나 윤석열 정부 정책당국자 중 칼린과 헤커의 통찰을 무시할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은 없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어느 나라보다 예측가능한 국가"라고 입을 모은다. 한미가 믿지 않아왔을 뿐이다. 여전히 억제력을 맹신하는 한미가 상황을 새로 평가하고, 대북 태세를 전환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 같다. 한반도는 그래서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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