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한반도 위기를 경고하면서도 한반도 주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한반도 위협을 두 갈래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북한 대 한미'의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는 한반도 안의 긴장과 러시아가 포함되는 한반도 밖의 긴장에 각각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 위기에는 '피스 메이커'를 자처하지만, 한반도 주변 위기에는 적극 대응한다.
긴장 고조, 방관하지 않으려는 태세
특히 지난해 방위전략서에서 러시아를 중국, 북한에 이은 제3의 위협으로 규정한 일본에 대한 적의를 공공연히 내보인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2022년 3월 "남쿠릴열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자 석 달 뒤 태평양함대 군함을 파견, 일본열도를 한 바퀴 도는 위협적 무력시위로 응답한 적도 있다.
물론 극동 러시아의 경제 발전을 국가적 목표로 삼는 러시아가 한반도 주변에서 먼저 분쟁을 촉발하거나, 분쟁에 뛰어들 동기는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의 국경 근접과 대규모 난민 유입, 북한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저지 등의 이유로 직접 개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과 다른 점이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동쪽의 새로운 분쟁을 감당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 주변에서 긴장의 강도를 높인다면, 러시아도 상응하는 군사적 태세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구도다.
현상변경세력이 등장하면 기존 세력은 경계한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정주의 또는 현상변경세력으로 지목하고 경계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러시아의 한반도 위기 인식은 바로 미국을 이 지역의 현상변경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위협 대 위협, 대응 대 대응의 방정식은 복잡하지 않다. 서로 비슷하게 대칭적 위협을 제기한다면 분쟁 위험이 크지 않다. 상황 관리가 가능해서다. 그러나 한쪽의 위협에 다른 쪽이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비대칭 상황이라면 위험이 증폭된다. 군사적 긴장의 고조는 가스가 유출된 실내 공기와 비슷하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작은 불티가 큰불로 이어질 수 있다.
'비대칭 대응'의 운명
조태용 국정원장 후보자가 지난 1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하면 2배, 3배 강한 대응을 하겠다"고 다짐한 게 비대칭 대응의 전형이다. 합참이 5일 북한이 서해에 200발의 포사격을 하자 400발로 대응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더 강한 도발이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을 거라는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북한의 핵, 미사일 프로그램이 위협 요소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응한다면서 미국이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것을 더 주목한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12일 브리핑에서 "미국과 한국이 벌이는 '더 큰 규모(yet more large-scale)'의 군사 연습, 해군 연습은 한반도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이 지역의 무기 구축으로 볼 때 어떠한 성급한 움직임이나,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무력 충돌의 불티(spark)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미는 북한의 핵, 미사일 프로그램이 강화된 만큼 한미, 한미일이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사시 유엔군 사령부를 복원한다면서 영국과 호주 등 참전국 군대도 연합훈련에 참여시킨다. 러시아는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북핵 위협보다 더 큰 비대칭 대응이자 한반도 주변에 대한 현상변경 움직임이라고 본다.
러시아가 잇달아 제기하는 한반도 위기설은 △남북의 불길한 '강 대 강' 무력 대치에 더해 △북러 간 군사적, 전략적 대화에서 확보한 북한의 위협 인식 △미국의 군사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 인식이 종합된 결과다. 한미는 올해 미국 전략자산의 정기적인 한반도 출현뿐 아니라, 8월 핵전쟁 연습도 벌일 예정이다. 러시아의 위협 지수가 더 높아질 것을 예상케 한다. 러시아 입장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한반도 현실의 일부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현단계 북한이 군사적, 전략적 대화를 나누는 나라가 러시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 자체의 대외 전략과 함께 러시아가 접한 북한의 심중을 감안, 한반도를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배, 3배 대응이 도발 막는다?
러시아의 안보 인식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과 함께 긴장을 높이는 한국을 오히려 협력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한국은 러시아와 달리 한반도 안과 밖의 긴장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에 몰빵한다. 연합훈련의 지정학적 함의를 덜 고민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적'인 미국, 일본과 함께 러시아를 적극 비난하고 있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독자 제재도 한다. 2022년 57개, 2023년 2월 741개를 대러 수출통제 품목으로 지정했다. 대통령이 키이우를 방문, 우크라의 승전을 기원하며 인도적, 경제적 지원과 함께 군수지원도 다짐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과 관계 복원을 희망하는 신호를 내보냈다. 적어도 작년 말까지 그랬다.
작년 4월 태평양함대 연례 훈련을 앞두고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비우호국' 중 유독 한국 무관들을 사전 브리핑에 초청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4일 이도훈 주러 대사에게 신임장을 주면서 "러시아와 한국의 협력이 양국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파트너 관계 궤도로 복귀할지는 한국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는 같은 달 26일 대러시아 수출통제 품목을 682개 추가, 1480개로 확대하는 3차 제재로 답했다. 웃는 낯에 침을 뱉은 격이다. 자하로바는 다음날 브리핑에서 "미국의 지령에 따른 비우호적 행동"이라면서 보복 조처를 예고했다. 시기는 한국이 3차 제재를 공식화하는 2월 말로 예상된다. "(보복 조치가) 굳이 대칭적일 필요는 없다. 한국은 (러시아 조치에) 놀라지 말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비우호적 행동이나 제재를 취한 국가에 대해 필요한 대칭, 비대칭 조처를 취할 것을 명시한 '2023 러시아 외교정책 컨셉' 26항을 소환한 것이다. 경제적 보복으로 예상되는 대칭 대응도 문제지만, 비대칭 대응은 더 심각하다. 러시아는 선택지가 많기 때문이다. 북한의 재래식 군비강화를 지원하는 등의 정치적, 군사적 조치일 수도 있다. 26항은 '비우호국의 행동을 제압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은 격
한국이 원전 연료의 70%를 의존하는 우라늄과 각종 희귀 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러 관계의 악화가 경제적인 피해만 남기는 건 아니다. 안보적으로도 악재다. 태평양함대가 올해도 대규모 훈련을 한다면, 한국 무관들을 사전 브리핑에 초청할 이유가 적어졌다. 한국은 이제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간접 확인해야 할지 모른다.
작년 10월쯤 예정됐던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 차관의 방한도 감감무소식이다. 우리 정부가 적극적인 대화 노력을 하고 있다는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러 관계 악화는 다음 달 말로 예정된 외교 현안이다. 그런데 12일 취임한 조태열 외교장관은 "러시아 측 인사가 방한하겠다는 계획은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사청문회 준비 과정에서 외교부 유럽국의 보고가 없었거나, 조 장관이 간과했거나 둘 중 하나다. 한러 외교 접촉을 두고 "상황이 개선되는 걸 봐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겠나"라는 한가한 전망을 내놓았다. 최우선 과제로 경제‧안보 융합 외교를 강조한 장관이 정작 임박한 경제‧안보 현안을 모르는 셈이다.
의도적 무시인가, 단순한 미국 줄서기인가, 둘 다인가
조 장관뿐이 아니다. 지난달 말 외교부 제1차관에서 8개월 만에 전격 발탁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바로 직전 주러시아 대사다. 방한이 예정됐던 루덴코 차관과 작년 6월 7일 모스크바에서 차관급 접촉을 가진 장본인이다. 장 실장도 한러 관계 관리 또는 개선을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북러 군사적, 전략적 협력이 획기적인 국면에 접어들은 건 분명하다. 백악관이 결정적인 증거(Smoking gun) 없이 제기하는 무기 거래설의 진위 또한 직접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추가 제재와 러시아의 보복 조치도 충격을 완화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계제다.
외교부는 한러 관계를 우려하는 질문에 "필요한 소통은 하고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해 왔다. 올해도 미국의 보폭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지난해와 달리, 대러시아 태세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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