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미국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우리와 다른 결정할 나라"

본문

 

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92)을 만났다. 60여 년 동안 북한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읽어온 강 장관의 GPS는 명료했다. "우선 '터널 비전(tunnel vision)'을 피하고, 전략적 사고를 가지라"고 당부했다. 인터뷰는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음식점과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 자료실에서 4시간가량 진행됐다. 이후 세 차례의 전화 통화로 보완했다. 주제별로 나눠 그 대강을 전한다.

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이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자료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 시민언론 민들레

"중국, 러시아와는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이 아니라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따르기보다 기존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기업의 피해를 함께 봐야 한다."

강인덕 장관은 "안보하는 사람들이 상대국만 보게 되지만 우방과의 관계에서 우리 국익이 훼손되는 것을 한목에 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부터 이어진 한미 관계에서 "미국은 언제든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우리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1972년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코메콘(경제상호원조회의. 소련이 주도한 공산권 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들으면서 북한 역시 사회주의 맹방과의 관계에서 자국의 국익 훼손을 면밀하게 보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터널 비전을 피하고 상대국과 우방을 한목에 봐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 계기의 하나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평양 이북으로 북진을 망설였던 것은 그 지역을 중국과 협상할 여지가 있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이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자료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 시민언론 민들레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아직 전략적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면서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응하는 방식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중러와는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큰 만큼 한중, 한러 관계에서 기존의 협력노선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움직임을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강 장관은 대만해협 유사시 한국의 선택과 관련, "한국도 미국도 중국의 한반도 개입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대만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냉혹한 남북관계와 주변국 관계를 보는 그의 뇌리에는 늘 '사람'이 존재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에 "100배, 1000배 대응한다"는 말에서 그로 인한 북한 주민의 피해를 염려했듯이, 한러 관계 악화 와중에 2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카레이스키(고려인)의 안위를 걱정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두 국가, 두 민족' 발언 뒤 혼동에 빠진 총련 동포들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 국제관계. 러시아는 북한이 군사적, 전략적 협력을 하는 나라로 떠올랐다. 미국과 북한은 적대관계이지만, 상호 비방을 자제하고 있다.

-'터널 비전'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역사가 길다. 한국전쟁 때 아이젠하워의 휴전 결정도 그랬고, 1·21사태와 그 이틀 뒤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을 보는 미국의 태도가 극명하게 바뀌는 것도 그런 생각을 갖게 했다. 북한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걸 확인했다. 1972년 11월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 자격으로 방북했을 때였다. 김일성이 만찬을 제공했는데 그 자리에서 코메콘(COMECON)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말했다. 흐루시초프(소련 공산당 서기장)가 코메콘에 가입하라는데 내용을 보니 '우리'(북) 물건은 싸게 가져가고, 자기들 물건은 비싸게 들여오라는 거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소련에 '당신들이 대학생이면, 우리는 소학생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는 산에 땅구멍만 남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가입을 거부했다고 하더라.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가 얼마나 냉혹한지 알게 됐다."

-북한도 사회주의 맹방과의 관계에서 국익 훼손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군요.

"일각에서 북중러 북방 삼각관계를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냉전 때부터 냉혹함을 경험한 중국이기에 지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함께 하는 것 같지만 속내는 다르다고 본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결코 깰 수 없다. 북중 관계도 그렇다. (2014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아직도 개통되지 않은 신압록강 대교를 보라. 북한이 다리 건설한다고 중국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받고도 북한쪽으로 내려가는 부분의 공사를 미뤘다. 북방 삼각관계를 자세히 봐야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각국 대사들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기 전 인사말을 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러 경제협력 관계 복원에 관심을 표명했다. 2023.12.4. TASS 연합뉴스

-한국전쟁 당시 한미 간에는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요.

"1950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수복된 평양을 방문했다. 당연히 대통령 자격으로 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개인 자격이었다. 그 이유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평양 부근에서 멈췄으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그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만주 보호를 위한 완충지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닉슨 독트린과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베트남전을 황급히 종식시켰다. 당시 키신저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존재를 인정하고, 파리 3자 회의를 열지 않았나. 당시 미국이 남북미 3자 회의도 준비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을 저버린 결정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걱정했었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우리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나라다. 베트남 전쟁 때는 소련이 무기를 보내면 중국 쿤밍을 거쳐 북베트남에 전달됐는데 중국이 그곳에서 새 무기를 헌 무기로 바꿔 보냈다. 무슨 이런 혈맹이 있나."

-윤석열 정부 들어 대중, 대러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은 국가안보전략서에서 중국을 '제1의 위협'으로 규정하고도 작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1시간 가량 중일 정상회담을 했지만, 한중 정상은 선 채로 3분 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일본은 또 '제3의 위협'으로 규정한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전보다 더 많은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종합적, 전략적 사고가 없는 거다.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기존의 협력 노선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했을 거다.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을 구상해야 한다. 러시아에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가 다 들어가 있는데 엄청난 손해를 입는 상황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응하기만 하면 안 된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아직 전략적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 디커플링적 문제와 디리스킹적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2023.11.17. 연합뉴스

-한중, 한러 관계가 삐걱거리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중국과는 고위급 접촉이 중단됐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이달 중 수출통제 품목을 대폭 늘리는 3차 제재 공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아닌 것 같다. 러시아가 과거처럼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미국과의 협력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겠지. 중국과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살 수 있는 나라들이 아니다. 상당히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국경이되 국경이 아니다. 러시아에만 약 20만 명의 카레이스키(고려인)가 있고, 모스크바에만 5만 명이 산다. 러시아 세력권인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포함하면 전체 50만 명이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고려인들이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모스크바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종효 교수는 고려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용산 대통령실과 도렴동 외교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까지 했더라."

-대만 해협 유사시 한국이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에게 파병 요청을 했지만, 미군 2개 사단을 한국에 남겨 두었다. 중국을 고려한 조치였다. 베트남전이 끝난 뒤에나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대만 사태가 일어나도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중국이 북한을 이용해 우리에게 피해를 줄 명분이 없어진다. 주한미군이 개입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경우 '우리의 결정이 아니라, 미국의 결정'이라며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 미국도 한반도가 중요한 지역이고,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구실을 안 주려 할 것이다. 지난달 대만 대선 전 대만 동료들이 찾아와 묻길래 '대만전쟁이 나도 우리는 개입 안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 모델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대만까지 가는 난세이(南西) 제도의 모든 섬에 방어선을 구축, 미국과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지만, 중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이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자료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 시민언론 민들레
 

-러시아는 극동 개발을 위해 한반도 안정이 도움이 된다고 보고 적극성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투자를 바라고 있구요.

"러시아 극동 인구가 500만 명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르강 건너편 중국 쪽의 인구는 1억 8000만 명이다. 러시아로선 무서울 거다. 몇 년 전 북중러 국경이 만나는 지역을 답사해 보니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영토를 지나 하산까지 가는 구간이 고작 15㎞인데 러시아가 철로를 건설하지 않고 있더라. 왜 안 하겠나. 그걸 해놓으면 중국인들이 물밀듯이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 강인덕 장관 인터뷰 ① 강인덕 장관 인터뷰 ②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