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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한고비 넘긴 81세 바이든의 '기억력 리스크'

by gino's 2024. 3. 22.

"그렇게 안 뵐 수도 있지만, 저도 꽤 오래 살았습니다. 제 나이가 되면 몇 가지 사실이 전보다 더 명확해지죠. 저는 미국 이야기(the American story)를 압니다. 미국의 영혼을 놓고 경쟁하는 세력 간의 싸움을 몇 번 목도했습니다. 미국을 과거로 되돌려는 사람들과, 미국을 미래로 움직이려는 사람들 간의 싸움이었죠. 일생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끌어안으라고 배웠습니다. 미래는 미국을 규정해 온 핵심 가치 즉, 정직과 품위, 존엄, 평등에 토대를 둡니다. 모두를 존중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되, 증오에는 어떠한 안전한 기항지를 주지 않는 미래죠. '제 또래의 다른 사람(트럼프)'은 미래를 다르게 봅니다. 원한과 복수, 보복의 미국 이야기를 합니다. 전, 아닙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부통령 퇴임 뒤 기밀문서 불법보관 문제를 수사해온 한국계 로버트 허 특검이 12일 미 하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바이든의 인지능력을 조사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024.3.12.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국정연설의 한 대목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임기 4년 중 마지막 국정연설은 대개 선거유세로 흐르기 마련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많은 숫자를 거론하며 국내외 현안에 대한 치적을 과시하고, 대통령직을 한번 더해야 할 당위를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가자지구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현안에 대한 입장도 확인했다. '고령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인정 위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특히 나이가 듦과 생각의 낡음을 구별한 대목이 꽤 심금을 울렸다.

너무 늙었다고?

"살면서 너무 어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30세에 시작한 상원의원 시절) 몇 번이나 의원 전용 승강기에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또 너무 늙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렸건, 너무 늙었건 저는 영속적인 게 무엇인지 압니다. 바로 우리의(미국의) '북극성'이죠. 미국의 본질은 우리가 평등하게 창조됐고, 평생 평등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완벽하게 그런 생각대로 살지 못했지만, 그 생각에서 멀어진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말, 나는 낙관적입니다, 낸시. (…) 국민 여러분, 미국이 직면한 이슈는 나이가 아니라, 그 생각이 얼마나 오래된 것이냐는 겁니다."

바이든은 64분 동안 시종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며 여유 있게 자신의 아젠다를 내놓고 청중과 시청자를 상대로 미국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을 토로했다. 81세의 나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정력적이었다. 14개 공중파 채널과 케이블 채널에서만 3220만 명이 실시간 시청했는데, 이는 2730만 명이었던 작년 국정연설 때보다 18%가 늘어난 규모다(닐슨 데이터). 청중석에 앉아 있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83)을 호명하는 한편, 그 자리에 없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내 또래의 다른 사람' '전임자'로 부르며 여러 차례 소환해 자신의 차별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임기 마지막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싸잡아 비판했다. 2024.03.08. EPA 연합뉴스

국정연설 24시간 내 1000만 달러(약 133억 원)의 정치자금이 쏟아지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역사가 지켜보고 있다"라면서 2021년 1·6 의사당 폭동을 끌어오고,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면서 하원에 계류 중인 600억 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의 통과를 요구했다. 이번 대선을 '민주주의 대 극우 포퓰리즘의 대결'로 설정했다.

특검, 청문회 양당 정치적 공격 방어

바이든의 국정연설은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고령 문제를 최대한 희석하고, 증오와 혐오를 확산하는 트럼프 캠프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는 한 번의 명연설로 사라지지 않았다. 연설 나흘 뒤인 12일 공개된 로버트 허 특검의 바이든 인터뷰 내용이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일부 내용이 지워진 상태로 공개된 258쪽의 대화록은 허 특검이 바이든이 부통령 임기가 끝난 뒤 기밀 유출 및 기밀 불법 보관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작년 10월 8일 5시간 동안 나눈 대화록이다. 약 1년간 진행된 특검 수사의 마지막 과정이었다.

미국 언론은 "대화록은 허 특검의 조사보고서보다 대통령의 더 미묘한 모습을 보여준다(NPR)" "바이든은 허 특검이 만들어 낸 것처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워싱턴포스트)" "장남 보의 사망 연도를 비롯한 일부 내용을 제외한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많은 사안에서 매우 상세하고 명석한 기억력을 보여줬다(뉴욕타임스)" "바이든 대통령은 특검 조사 때 말이 많았고, 활기차 보였다. (논점에서) 자주 벗어났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에는 주저하지 않았다(월스트리트 저널)"라는 각양각색의 평가를 내놓았다. 언론이 어떤 평가를 하건, 중요한 사실은 바이든의 고령과 인지능력이 다시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자택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을 치른 15개 주 가운데 버몬트를 제외한 14개 주에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에 승리했거나,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2024.03.06. 로이터 연합뉴스

뉴욕타임스가 전한 대화록에 따르면 바이든은 부통령 퇴임 뒤 업무 관련 서류를 어디에 보관했느냐는 허 특검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 그때 아들(보)가 파병됐고 또 죽어가고 있었다. (혼잣말로) 보가 언제 죽었지? 맙소사"라며 머뭇거렸다. "트럼프가 당선된 게 2017년 11월이었나?"는 바이든의 질문에 누군가 "2016년"이라고 바로 잡은 대목도 담겼다. 바이든은 2009년 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백악관 공격에 특검 변호한 법무부 

전날 법무부 특검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12일 하원 법사위 청문회에 출석해 "대통령의 기억력에 대한 특검 보고서에서의 내 평가는 필수적이었고, 정확했으며, 공정했다"고 강조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특검이 바이든을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따졌고, 민주당 의원들은 바이든의 기억력을 문제로 삼은 이유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허 특검은 지난 2월 8일 자 기밀 유출·불법 보관 의혹 특검보고서에서 "바이든이 부통령 임기 종료 뒤 민간인 신분으로 기밀문서를 고의로 보유한 혐의가 있지만, 기소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었다. 기소하지 않은 이유는 "(재판에서) 바이든은 배심원단에 악의는 없지만 기억력이 나쁜 노인으로 보이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바이든의 기억력을 조사한 이유에 대해 "범죄 성립에 필수적인 의도의 유무를 평가하는 작업은 대통령의 정신상태를 평가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라면서 "(평가 결과)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법무부가 12일 공개한 로버트 허 특검의 조사 자료.  비밀 유지가 필요한 대목은 검은색으로 지웠다.

민주당 의원들의 질타는 재미동포 2세대인 허 특검이 공화당원 신분이라는 점에 집중됐다. 그는 그러나 "확언컨대 당파적 정치는 내 업무와 내가 한 수사와 결정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정파성을 먼저 문제 삼은 건 백악관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2월 9일 보고서가 "공정한 법률 문서라기보다 정치적 공격"이라고 주장했고, 이안 샘스 백악관 대변인은 "보고서가 부적절하고 문제 소지가 다분하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둔 미국 의회와 백악관은 한국 국회와 대통령실처럼 정파적인 주장이 난무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가 균형을 잡고 나섬으로써 한국 정부와 확연한 차별성을 보였다. 브래들리 바인샤이머 법무부 부차관보는 다음날 공식 회신에서 "법무부의 공개 기준에 매우 잘 부합된다"며 백악관의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트럼프 사법 리스크도 고비 넘겨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 걸린 양대 리스크는 모두 후보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는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와 함께 대선판의 최대 변수이지만, 이날 청문회를 정점으로 고비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앞으로도 바이든의 고령과 기억력에 대해 정치적 공격을 계속하겠지만, 적어도 법적으로 투명하게 매듭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지난 달 28일 정기 건강검진을 받고 "직무수행에 문제가 없다"는 주치의의 메모를 공개했었다.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 역시 연방대법원이 지난 4일 트럼프를 콜로라도주 공화당 예비선거 후보 명단에서 제외한 주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대선후보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고비를 넘겼다. 세계가 어쩌다 한 후보의 고령을 걱정하고, 다른 후보의 불법 행위와 추잡한 사생활에서 비롯된 91개의 혐의에 관심 두게 된 현실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미니 슈퍼 화요일'로 불린 12일 조지아, 미시시피, 하와이, 워싱턴 주 등에서 치러진 경선 결과 각각 당내 대선후보 확정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수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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