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정상회의'에는 평화가 없었다. 15~16일 스위스 니드발덴 주의 알프스 휴양지 뷔르겐슈톡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정상회의'가 끝났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작년 8월 주최, 별 성과 없이 끝난 회의의 확대판이었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도모하려면 교전 당사국 대표들이 참가하는 게 상식이다. 회의는 그러나 기획 단계에서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다. 평화 중재라기보다 우크라와 서방 진영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세를 과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투영됐다.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온몸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미·중, 미·러 갈등 시대의 모순이 고스란히 되비쳤다.
젤렌스키 10대 요구 중 3개를 공동선언에 담아
회의가 16일 채택한 '평화의 틀에 관한 공동선언'은 포괄적이고, 정의로우며 지속적인 우크라 평화를 담았다. 그러나 다른 평화 제안들과 함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의 일방적인 희망이 투영된 '평화 공식'을 토대로 함에 따라 참가국들의 만장일치의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했다. 공동선언은 전문에서 우크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의 영토적 통합과 정치적 독립에 대해 위협이나 무력 사용을 자제할 것을 강조했다.
본문은 첫 번째로 핵 안전의 원칙을 다뤘다. 핵에너지와 핵시설의 안전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 건전한 사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포리자 원전을 포함한 우크라 원전과 핵시설은 우크라의 주권적 통제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원칙에 따라 안전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크라 전쟁의 맥락에서 어떠한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글로벌 식량 안보를 위해 식량의 생산, 공급이 통제받지 말아야 한다면서 흑해와 아조프해의 항구 접근권뿐 아니라 상업적 항행의 안전을 촉구했다. 세 번째는 모든 전쟁포로의 석방 및 완전한 교환을 촉구했다. 모든 강제 추방자와 불법, 강제적으로 옮겨진 우크라 어린이와 억류된 우크라 민간인의 본국 귀환을 촉구했다. 세 가지 조항은 우크라의 주장을 전면 수용한 것이다. 러시아의 불참으로 최소한의 실현 가능성도 확보하지 못한 촉구에 그쳤다.
유럽 최대 규모의 자포리자 원전은 러시아 군의 통제하에 있다. 그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러시아 군의 군사행동이 아니라, 우크라 군의 공격에 따른 교전으로 핵사고 우려가 큰 곳이다. 식량 안보 문제 역시 러-우와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할 사안이지, 일방적으로 주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맺은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2022년 7월부터 1년 동안 우크라의 식량 수출을 담보했다. 그러나 러시아 식량과 비료의 수출을 허용하지 않음에 따라 중단된 상태. 이 역시 우크라 식량만 수출토록 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 탓에 진전이 되지 않고 있다.
우크라 곡물수출만 보장 촉구
우크라 어린이 강제 이주 문제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푸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사안이다. 개전(2022.2.24.) 초기 1만 6221명의 어린이를 우크라 남부 점령지에서 러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게 우크라 정부의 주장이다. 러시아 측은 안전지대에서 입양과 양육,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올라 암헤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폐막 연설에서 "추가적인 단계가 필요하지만, 이번 회의가 계기를 마련했다"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결과는 '회의를 위한 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16일 현지 매체 스위스엥포에 따르면 100여 개의 참가국 및 국제기구 가운데 우크라의 영토적 통합성을 지지하는 공동선언에 동의한 국가-기구는 84개 불과했다.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을 포함, 57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브라질과 인도, 남아공은 물론 회의에 불참한 중국과 러시아 등 브릭스(BRICS) 주요국과 글로벌 사우스(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개도국)가 반대했다. 아르메니아, 바레인, 리비아,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콜롬비아, 수리남, 인도네시아, 태국도 서명하지 않았다. 영세중립국인 주최국 스위스와 교황청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참가국들은 우크라 평화 과정에 러시아를 포함할지에 대해서조차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주최국 스위스는 러시아의 참가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내보였지만,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5일 러시아를 협상장으로 불러낼 구체적 조건보다 우방국들과 함께 공동의 원칙을 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없는 단합' 또는 '반러시아 연합'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애당초 평화와는 거리가 먼 평화회의였다. 러시아와 우크라는 각각 상대국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했다. 14일 스위스에 입국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주말 회의에서 참가국들이 내 주장에 동의하면, 러시아가 전쟁을 끝내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러시아 없이 무슨 평화 논의하나"
그가 말한 주장은 '젤렌스키 10대 평화공식'이다. △방사선 및 핵 안보와 △식량 안보 △에너지 안전 △모든 전쟁포로와 억류자 석방 △환경보호와 러시아의 우크라 생태학살 중단 △새로운 안보 구조 및 우크라 안전 보장 △평화조약 체결 등은 그나마 실제적,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크라 영토 통합성 복원 및 유엔 헌장 존중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 △전쟁범죄 처벌을 명시한 5~7항은 러시아가 완전히 패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조건들이다. 러시아의 전쟁 배상도 요구하고 있다. 우크라 '영토 복원'은 크림반도를 포함, 1991년 독립 당시 영토 복원을 의미한다. 10여 개국이 공동선언에 동의하지 않은 이유다.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 참가국들은 젤렌스키 평화공식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해서 젤렌스키와 스위스 정부는 이번 회의 의제를 핵 안전과 식량 안보, 포로 교환을 비롯한 인도적인 문제 등 3가지로 축소했다.
이틀 동안의 회의에서는 그 자리에 없는 '러시아의 존재'가 시종 두드러졌다. 파이잘 빈 파르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왕자)은 "믿을 만한 과정은 러시아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고, 하칸 피단 튀르키예 외교장관은 "분쟁의 다른 쪽인 러시아가 참석했다면 이번 정상회의가 더 결과 지향적으로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셀소 아모림 브라질 대통령 외교정책 자문은 뉴욕타임스에 "협상은 적들과 하는 것이지, 친구들과 하는 게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암헤르트 대통령은 "러시아 없는 평화과정은 생각하기 어렵다.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러시아가 포함될 수 있는지 의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푸틴 "젤렌스키 내년 초 실각할 것"
푸틴은 14일 러시아 외무부 간부들과의 회의 석상에서 러시아가 2022년 9월 통합한 헤르손, 자포리자,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 4개 주에서 우크라 군이 전면 철수하고, 비무장 중립국화, 비 나치화 및 비핵 지위를 평화협상의 조건으로 밝혔다. 중립국화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계획 철회가 포함된다. 이는 러시아가 부분 점령하고 있는 4개 주를 전부 러시아 영토에 포함하겠다는 것으로 역시 우크라의 무조건 항복을 전제한다. 이는 2022년 4월 초 이스탄불 평화협상에서 러-우 간 접근했던 핵심 조건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당시엔 우크라의 중립화를 전제로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를 약속했었다. 2014년 점령 또는 통합했던 돈바스 지방 일부와 크림반도는 제외했다. 푸틴이 2022년 2월 24일 '특별군사작전'을 시작하면서 공표한 명분에도 4개 주 병합은 없었다. 한마디로 러-우 모두 평화협상에 마주앉을 준비가 안 됐음을 확인한 것. 러시아는 회의 기간 도네츠크주를 비롯한 점령지에서 우크라 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푸틴은 또 젤렌스키가 2025년 상반기에 국내와 서방의 압력에 실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골 깊어진 G7 vs. BRICS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선거자금 모금행사를 빌미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참석케 했다. 우크라가 마지막까지 참석을 희망했던 중국은 아예 회의를 거부했다. 브릭스 주요국 중 인도와 남아공은 장관급 또는 하위급 대표를 보냈고, 브라질은 옵서버 국을 자처하며 대통령 고문을 파견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주요 7개국(G7)과 브릭스 진영 사이의 골을 확인케 했다.
G7은 15일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폐막한 정상회의에서 각국이 동결한 러시아 국유자산의 이자와 대출 수입을 활용, 500억 달러(68조 5000억 원)를 우크라에 지원키로 했다. 러시아의 침략전쟁 종결 및 우크라에 대해 4860억 달러(675조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면서 "러시아의 의무를 이행케 할 모든 합법적 방법을 계속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과 관련, 안보리 제재 결의를 위반하는 북한의 탄도 미사일 수출과 대러시아 무기 공급, 북러 간 군사협력을 '가장 강력한 용어'로 규탄했다.
윤석열 잇달은 불참
작년 7월 키이우를 전격 방문, 우크라의 승전을 기원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G7 정상회의와 우크라 평화 정상회의에 초청받지 못했거나 불참했다. 그는 우크라 방문 당시 '젤렌스키 평화공식'을 공개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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