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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공해 '금강산 전철'을 놓으면 어떨까? 이미 있었다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7. 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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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화강 용양철교의 잔재. 가마우지 떼가 털을 말리고 있다.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미래의 길이자, 과거의 길 이야기 한 편. 언젠가 많은 탐방객이 금강산을 찾으려면 전기철도가 좋을 법하다. 화석연료의 독성 폐기물을 뿜어내는 교통수단과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터. 자연에 생채기를 주지 않으면서도 다수가 금강을 밟게 할 묘안이 아니겠나. 먼 '미래의 길'이지만, 정확히 100년 전 철로를 놓기 시작한 '과거의 길'이기도 하다.

철원~김화 간 전기철도가 놓이고 전동열차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24년 11월 26일이었다. 이듬해 금성까지, 다음 해엔 창도까지 순차적으로 철로를 놓았다. 철원~내금강을 잇는 28개 역 116㎞의 전 구간이 완성된 것은 1931년. 철원~김화~금성~탄강~(단발령 터널)~창도~현리~화계~말휘리~내금강역. 오랫동안 은성했던 장소들이지만, 분계선 이북인 탓에 지명들이 낯설다. 일본인 민간기업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가 매긴 열차권 가격은 7원 56전. 쌀 한 가마니 값이었기에 살림이 푼푼한 부자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모형 금강산 전차의 창밖 풍경.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금강산 전차의 모형.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지난 26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애초 방문을 계획했던 전쟁기념일은 공교롭게 철원군 내 주요 방문지가 문을 닫는 화요일이었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한국전쟁 발발 74주년 맞아 답사지로 선택한 곳은 생창리 생태평화의 길. 비무장지대(DMZ) 생태평화 문제에 천착해 온 박경만 박사(고양신문 편집인)가 전체 분계선 탐방로 중 으뜸으로 꼽은 길이다.

우리는 군사분계선 이북만 모르는 게 아니다. 경계선상의 중부지방도 모른다. 연천~철원~김화는 해방 당시 인구가 30만을 웃돌아 호남 제1의 도시였던 전주나 상업중심지 개성 못지않게 북적이던 곳이다. 왜 안 그랬겠는가. 최고 경제작물이었던 쌀을 생산하는 평야를 끼고 있는 데다가 뭍길(경흥가도, 경원가도, 경원선)과 물길(한탄강, 임진강, 한강)로 서울과 연결된 번영의 땅이었다. 김화군은 전쟁 뒤 3분의 2가 이북에 위치하게 돼 철원군 김화읍으로 편입됐다. 경기도 장단군의 3개 면이 연천과 파주에 나뉘어 편입된 것과 마찬가지다.

철원~내금강 역을 잇던 금강산 전차가 다니던 철로. 표준철로(1435㎜)가 다니라 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광폭철로다.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의 탐방로는 해발 580m인 성재산 정상이 포함된 십자탑 제1코스와 용양보 제2코스가 있다. 두 코스 모두 민간인 통제선 북방의 군부대 관할지역. 이중 한탄강 지류 중 가장 큰 화강 물길을 막아 조성한 용양보 둘레를 걷는 코스를 잡았다. 저수지 아래쪽은 금강산 전기철도와 위쪽은 경흥가도와 각각 맞닿았다.

경흥가도는 유서 깊은 길이다. 왕건이 금강산에 불공드리려 밟은 길이고, 함흥에 칩거한 이성계가 오가던 길이자 함흥차사의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걸었다. 일제 초기 1914년 경원선 철도와 함께 닦은 경원가도보다 오래된 길이다. 가출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청년 정주영이 서울로 달려가던 길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도봉동~의정부~포천을 지난 뒤 철원~김화~금성~창도를 거쳐 철령을 넘고 나면 안변~원산~함흥으로 이어진다. 창도에서 단발령을 넘으면 금강산. 겸재 정선이 멀리 금강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린 곳이다. 까마득히 잊힌 길이지만, 용양보와 군부대 철책 사이에 일부 남아 있는 옛길이다.

용양보 탐방로 안내.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용양보는 화강 위로 금강산전기철도가 다니던 용양철교의 남은 교각과 교각 사이를 막아 조성한 저수지. 병사들의 수색 정찰로 용으로 1973년 만든 출렁다리(삼성교)도 흔적만 남아 있다. 화강 물줄기와 성재산, 계웅산. 강가의 국내 최대 왕버들 군락지와 '김화 곶자왈'의 현무암 원시림이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만든다. "한반도가 간직해 온 가장 비밀스럽고 순수한 자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풍경화." 생창리가 고향인 탐방 길라잡이 황종현 선생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수많은 물고기가 서식하고, 하루 700g의 물고기를 먹어 치우는 가마우지 떼가 부러진 다리 난간에서 한가로이 털을 말리고 있었다. 물가는 물론 탐방로에까지 자라가 기어 나온다. 뱀이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지만 다행히 탐방길에 마주치지 않았다. 먹이사슬의 정점은 독수리만 한 덩치의 민물가마우지. 왕성한 먹성 탓에 유해조수이지만, 이곳은 가장 풍요롭고 안전한 서식지다. 기후변화 탓도 있지만 겨울 철새였던 가마우지가 눌러앉아 텃새가 된 연유다.

용양보.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야생 동식물의 천국이지만 한반도 거주민에게는 야만의 현장이다. 생창리 마을에는 민통선 이북에 속하던 1960년대부터 건설된 재건촌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철원과 김화의 도심지는 전쟁 당시 100% 파괴됐다. 전쟁 폐허였던 이곳에 처음 정착을 허용한 100가구는 생창리 원주민과 실향민, 재향군인을 섞어 선정했다.

화강 자라.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생창리에는 1970년 건립된 주택 50채 중 한 채가 남아 있었다. 1건물에 2가구가 거주하는 일종의 듀플렉스(duplex)였다. '한 손에 총, 다른 손에 삽'을 들었다던가. 군사독재 시절에는 마을주민들이 길에서 군 장교를 만나면 깍듯하게 경례를 했다고 한다. 외지서 친지가 찾아올라치면 군장병 면회하는 것처럼 신고, 대기해야 했다. 지뢰를 제거하고 농경지를 개척했다. 여전히 민통선 북방에 있는 인근 마현리에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쑥대밭이 된 울진 주민 66가구가 '이주됐다'. 자립안정촌-재건촌-통일촌 형태로 원주민과 남과 북의 주민이 한마을을 이룬 것이다. 뒤늦게 소유권을 주장하는 땅 주인들과 송사도 치러야 했다. 38선 이북, 군사분계선 이남의 수복지역은 전쟁 중 우리 주권이 미치지 못하던 땅이었다. 1954년에나 유엔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한반도 거주민에게 여름은 두 개의 '시간 행로'가 상처처럼 그어진 잔인한 계절이다. 하나는 6.25에서 7.27까지 32일 간의 여정이다. 전쟁 발발에서 정전까지 돌아보며 '분단의 현재'를 걷는 길이다. 두 번째는 8.15에서 8.29까지 시간을 역순으로 되짚는 길이다. '광복'이 먼저고 '국치'가 나중인 시간의 전복은 뒤집힌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아 속이 아린 여정이다. 경흥가도와 일본인들이 놓았던 금강산 전기철도를 품은 김화읍 탐방로에는 두 개의 시간 여정이 겹쳤다.

철원군이 탐방객 안전을 위해 설치한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김화 곶자왈(현무암 원시림). 2024.6.26. 시민언론 민들레

국권을 잃었지만, 큰돈을 내고 금강산을 찾는 '식민지 졸부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1936년 한해 금강산전기철도 이용객이 15만 4000여 명. 4시간 30분이 걸리는 철원~내금강 전차는 하루 8회 운행했다.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는 애초 철원~내금강 전기철도를 동해북부선의 외금강 역까지 연장하는 사업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새 철로는커녕 있는 철로도 뜯어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창도~내금강 역 구간의 철로를 뜯어 전쟁물자로 썼다. 언젠가 복원해야 할, 아니 새로 놓아야 할 금강으로 가는 길이다. 탐방 도중 탈북자단체가 살포한 대북 전단도, 북이 살포한 오물 풍선도 밟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033) 458-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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