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당한 걸까? 지난 주말 국내 언론이 그야말로 광풍을 몰아치게 한 발원지였던 국가정보원의 보도자료. 북한군의 파병을 입증했다는 국정원 발표가 일거에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그래도 국정원인데…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용과 정체가 묘연한 위성사진. 우크라이나 정부가 먼저 흘렸으되 신빙성이 의심됐던 증거와 별 차이 없는 정보. 까면 깔수록 끝없이 나오는 '김건희 스캔들'은 뉴스 뒤편으로 밀렸고, '한국 무인기 평양 침범'이라는 북한의 발표도, "한국이 '대북 도발' 하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사상 초유의 규탄도 포탈 검색 순위에서 내려갔다. 적어도 여론의 관심을 일거에 돌린 점에서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2년 8개월째 간접적이되 주도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국정원발 '북한 악재'를 무시 또는 외면하고 있다. 최소한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한다.
의심할지언정 발표를 외면하기 힘든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기밀정보를 독점하는 기관이 아닌가. 더 중요한 까닭은 기본적 신뢰 때문일 거다. 그래도 국가기관인데, 그것도 국정원이 설마 의도적으로 정보 또는 첩보를 부풀렸을까,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이었다. 주말의 광풍이 지나갈 즈음 간과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지! '중립적 정보기관'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국정원이었다는…. 얼마든지 정치적 의도에 휘둘릴 수 있는 관료집단의 하나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것도 '조태용의 국정원'이 아닌가. 지극히 평범한 외교 관료에서 정치꾼으로 변신했다가 윤석열 정부 들어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가 리더십의 정점에 앉은 기관. 국가안보실 실장이 4번째 교체되도록 건재한 김태효 제1차장의 입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도 놓쳤다.
국정원장 이전에 국가안보실장(2023.3.30~2023.12.31) 조태용이 누군가. 채상병 사망 사건의 관계자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빼돌리려다 국제적 남우세를 산 사건의 핵심 배후의 한 명. 4대 국책연구기관 구성원들과 주한 외교 사절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현재의 취약한 평화가 진짜 평화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철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이다. 정권 출범 1주년을 맞아 국가안보전략을 설명했던 작년 6월 내놓은 말이다. 안보가 정치에 오염되고, 정책과 정견의 경계를 흐린 말이었다. "내가 알던 외교관이 맞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올해부터 국정원장의 모자를 쓰고 언론의 감시망에서 날씬하게 벗어났다. 이들이 꾸려가는 외교안보가 상식적일 거라고 단정한 건 비상식적 접근이었다. "(북한군 파병 관련) 정확한 정보는 모르겠지만 국정원 러더십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불안하게 보고 있다"라는 정보 전문가들의 우려가 쏟아진다. "타락한 세상에 타락한 방식으로 적응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문예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새겨야 할 현실적 명제이다. 타락한 정권을 상식적으로 보면 허방을 짚는다.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원
보도자료는 의혹 투성이였다. 저널리스트는 질문을 던지는 게 직분 아닌가. 19일 오전 전화기를 들었다. △국정원 발표가 우크라 정부 발표와 일치하는 데 연관성이 어떻게 되나? △북한군 병사들을 수송했다는 러시아 해군 함정 7척이 청진, 함흥, 무수단 인근지역에 기항했다는 데 이 정도 함정의 이동궤적은 최소한 미국 정보자산이 파악하지 않겠나. 한미 간 정보공유 사안인가? △무인기 잔해가 우리 드론작전사령부 무인기라는 북한 주장을 정보당국은 어떻게 파악하고 있나? 등의 질문을 던졌다. "비상한 상황에 비상근무를 하고 있다"라면서도 "답변은 월요일(21일)에나 가능할 것 같다"는 말을 흘려 들었다. 국내 언론이 주말 동안 춤 출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월요일 오전까지 답신은 오지 않았다.
국정원 발표대로 북한군 1500여 명이 러시아 군기지로 이동했다고 치자. 그런데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 군기지는 우수리스크에 있다. 북한 라선에서 두만강 건너 육로로 97㎞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코 앞이다. 지난 12일 북한군 특수부대원을 실은 러시아 함정(국정원 발표 위성사진(보도자료 붙임1)이 이동했다고 지목한 청진~블라디보스토크는 해로로 230㎞인 데다가 움직임이 노출된다.
라선~우수리스크 간에는 철로와 도로가 있다. 아무리 정비 상태가 열악해도 병력이동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일단 러시아 군기지에 도착하면 군용기로 이동이 가능할 터.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걸어서 국경을 넘더라도 이틀이면 족할 거리다. 러시아가 보란 듯이 노출할 의도가 없었다면 해군 함정을 동원할 이유가 없다. 이 정도 의문에는 당연히 답할 의무가 있지 않나?
97㎞ 철도-도로 두고 해상 이동?
지난 1일은 국정원 최덕근 영사의 순국 28주기였다. 국정원 정문 옆 산자락에 국가를 위해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을 기리는 보국탑이 서 있다. 국정원 방문자센터에서 내다보인다. 19개의 '이름 없는 별' 가운데 유일하게 실명이 적힌 그는 1996년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중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괴한에게 살해됐다. 어디 이름 없이 헌신한 별이 19개뿐이겠는가. 아무리 정권이 흔들려도 국가만을 바라보고 부나비처럼 위험한 현장에 뛰어드는 게 국정원 요원들이다. 그게 바로 '국정원의 혼'이자, 국민을 숙연케 하는 상징이라고 본다.
혹여 국정원이 정치적 의도에서 북한군 파병 소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면, 그 '혼' 앞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신비주의 컨셉트'는 언론 노출을 피함으로써 오히려 관심을 끄는 일부 대중문화인이나 하는 행태다. 권력이 나그네처럼 오가더라도 드팀없이 자리를 지키는 게 '별'이다.
약발은 오래 가기 어렵다. 누군가엔 불행이고, 국민에게 다행인 점은 과장된 언론 플레이는 생명이 길지 않다는 사실이다. 결국 국민적 여론은 다시 대통령과 부인을 둘러싼 온갖 불안한 조짐에 쏠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최대 피해자는 국정원이다. 국민의 신뢰와 상식에서 더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별'이 떨어지면 국가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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