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임기는 지난 5월 말까지였다. 러-우 전쟁과 동시에 내려진 계엄령하에서 대통령 선거는 무기 연기됐다. 대선이 적전 분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사정은 자연스레 임기를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으로 정했다. 전쟁이 끝나면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2년 8개월 동안 소강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전쟁은 11월 5일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곧 끝날 수도 있다.
트럼프, 경합주 7곳서 모두 우세
지난 7월 말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대선주자 바통을 물려받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를 한때 2%P 넘게 벌렸지만, 계속 줄어 20일 현재 0.9%에 그친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의 각종 여론조사 집계치다. 트럼프는 애리조나, 네바다,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경합 주 7곳 모두에서 평균 1.0%P 해리스를 앞서고 있다. 트럼프는 "당선되면 우크라 전쟁을 곧 끝내겠다"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갈수록 처지가 궁박해지고 있다. 지난 9월 유엔 총회 참석에 이어 유럽 주요국 수도를 순회하며 전쟁 지원 확약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23년 가을 이른바 '반격전'이 실패한 뒤 그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인 2022년 3월 말, 90%까지 올랐던 지지율은 지난 4월 우크라 싱크탱크 라줌코프(Razumkov) 4월 조사에서 58.6%로 추락했다. 10월 키이우 국제 사회학 연구원(KIIS) 조사에서도 59%였다. 그러나 응답자 37%가 불신임했다. 볼로디미르 페센코 정치학센터(Penta) 소장은 르몽드에 "국가원수로서 젤렌스키에 대한 (국민적) 태도가 덜 감성적이고,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고 진단했다. 우크라 국민은 젤렌스키의 약점과 결점을 목도하고 있다.
우크라 군 일부는 지난 8월 러시아 쿠르스크 지방으로 진출했지만 1200㎞의 국내 전선 대부분에서 수세에 몰려 있다. 탄약과 포탄은 상시적으로 부족하고 병력 충원은 미뤄지고 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지원이 미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지도 불투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악 수준 부패는 전쟁 중에 더 심해지고 있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은 기본적인 안전과 생활 여건을 잃으면서 예민해진 상태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그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 신변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2년 전 워싱턴의 연방의사당을 방문했을 때 젤렌스키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지난 9월 26일 다시 찾은 미 의사당의 반응은 썰렁했다. 우크라 정부는 지난봄 미 의회가 승인한 610억 달러 상당 지원안의 대선 전 집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중 80억 달러 상당의 활공 폭탄과 방공 미사일, 패트리어트 포대 등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젤렌스키가 요구한 장거리 미사일과 전투기의 러시아 본토 공격은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의 나토 가입을 전제로 한 '승리 계획'을 설명했지만, 나토 회원국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계속 지원하겠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미 대선일이 다가올수록 젤렌스키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그 끝에 '북한 카드'를 내밀었다.
썰렁했던 젤렌스키의 방미
이달 초 우크라 전선에서 북한군 시신 6구가 발견됐다는 미확인 주장에서부터 시작해 북한군 1만 1000여 명이 러시아 극동에서 참전 준비훈련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입수 경위가 불투명한 위성 영상도 곁들였다. 전시에는 어느 나라 언론도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영국 가디언을 필두로 서방 언론이 우크라 언론을 인용 보도하기 시작했고, 많은 한국 언론의 추종보도가 잇따랐다. 세계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우크라의 '외로운 주장'은 18일 지구 반대편 분단국가의 반향을 얻었다. 우크라의 주장과 일치율이 거의 100%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정원의 발표가 그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미국과 나토는 여전히 "확인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분쟁국은 가급적 분쟁을 세계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다른 나라들이 적극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20일 심야 화상 연설에서 "불행히도 북한군이 현대전 훈련을 받게 되면서 불안정과 위협은 심각하게 커질 수 있다"라면서 "세계가 지금 침묵한다면 이란제 사헤드 무인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전선에서 북한군 병사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로이터 통신이 전한 연설 내용이다.
공교롭게 윤석열 대통령도 궁박한 처지다. 대통령 탄핵 여론이 국민 세 명 중 한 명(66.67%)에 달했다. '여론조사꽃'이 18~19일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3명에게 물은 결과다. 한국 갤럽의 10월 셋째 주(15~17일) 조사에선 지지율이 22%로 전주의 23%에서 더 줄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각을 세우고, 대통령 부인이 온갖 추문에 휩싸이면서 탄핵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 당국으로부터 "한국 무인기가 평양을 침범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확인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소한 북한 국방성이 18일 공개한 무인기가 "한국군 자산이 아니다"라고 부인할 만도 한 데 북한 주장을 계속 무시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1일 이달 들어 세 번이나 한국 무인기가 침범했다면서 "재발한다면 핵무기를 포함해 모든 무기로 공격할 것"을 경고했다.
국정원발 세계적인 뉴스 방출에도 우크라를 제외한 세계 반응이 시들해 보이자 직접 나섰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국군심리전단이 전방 지역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북한군 파병 소식을 북한 주민에게도 널리 알렸다.
김홍균 외교부 1차관은 21일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해 북한군 파병에 엄중한 입장을 던하고 즉각적인 북한군 철수 및 관련 협력 중단을 촉구했다. 상대국 대사를 초치하는 건 주로 공식적인 항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는 국정원 발표 사흘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주한러시아 대사관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오비예프 대사가 이 자리에서 "러시아 연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협력은 대한민국의 안보 이익에 반하지 않으며 국제법의 틀 내에서 실현되고 있다"라며 그러나 "한반도 긴장 고조 원인에 대해 러시아 연방과 대한민국은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북한군 파병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더 깊어질 북-러 전략적 협력
작년 7월 키이우를 방문한 윤 대통령은 젤렌스키와 손을 굳게 잡았다.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라는 젤렌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정신으로 우리가 강력히 연대해 함께 싸워나간다면 분명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는 덕담을 건넸다. "군수품 지원을 늘릴 테니 꼭 승리하라"고도 했다.
우크라의 실지 회복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전범 처벌이 포함된 젤렌스키 '평화공식'도 지지했다. 이를 바라본 푸틴 대통령은 두 달 뒤 러시아 극동 보스토치니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 정상회의를 가졌다. 지난 6월에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 북-러 간 '포괄적인 전략동반자 조약'을 전격 체결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남한 무인기 침범 주장을 100% 지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향해 "대북 도발을 중단하라'고 경고한 마당이다. 당시만 해도 윤 대통령은 적어도 국내적으로 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집권 2년 반이 다가오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부부의 처지만 궁벽한 게 아니다. 국민은 더 불안하다. 오죽하면 계엄령 가능성까지 세간에 나돌았겠나. '평양 무인기' 사태 뒤에는 "이러다가 정말 전쟁 나는 거 아니냐"는 국민적 우려가 지난 14일 합동참모본부 브리핑에서 전달됐다. 이런 상황에서 키이우 정상회담 뒤 1년 3개월 만에 한국과 우크라의 굳은 연대가 순차적인 북한군 파병 발표와 함께 거듭 확인됐다. 양국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보면, '궁박한 처지의 연대'라고 할만하다. 국가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이다. 한-우 대통령 간 연대가 깊어질수록 북-러 지도부 간 전략적 협력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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