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한민국 안보를 뒷전에 두고 국제 평화를 챙기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안보와 남의 안보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우크라 전쟁의 중심과 주변을 섞으면서 국가적 혼란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토 수장과 통화, 국정원 발표 직접 알려
대한민국이 국제 평화의 수호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적어도 대통령 이하 윤석열 정부는 그렇다고 말한다. 국가정보원의 18일 북한군 러시아 파병 발표를 출발신호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국정원 발표에도 북한군 파병을 '미확인 사실'로 간주하자 21일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통화를 하고 "최근 우리 정보당국이 북한 특수부대 1500여 명이 러시아에 파병돼 적응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직접 전했다. 전날까지 신중한 태세를 보이던 뤼터 총장은 이날 통화 뒤 자신의 X 계정에 "북한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심각한 확전이 될 것"이라고 썼다.
흥미로운 대목은 대통령이 우려하는 지점이다. 대통령은 "러·북의 무모한 군사적 밀착이 인·태 지역과 대서양 지역 안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신시키는 동시에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라면서 "우리 정부는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러·북 군사협력의 진전에 따른 '단계별 조치'를 적극 취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당사자인 나토의 뤼터 총장은 되레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러·북 군사협력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민국과 적극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한국 정부가 상세한 정보 공유를 위해 나토에 대표단을 보내 주라고 요청했다. 그다음이 중요하다.
뤼터는 "북한군 파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우크라-나토 간 방산 협력과 안보 대화를 강화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주·종이 바뀌었다. 나토보다 한국이 먼저 국제평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자, 나토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산 협력을 강화하자고 맞장구친 것이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 전쟁 초기부터 "한국의 결정에 맡긴다"면서도 직접적인 살상무기 지원을 희망해 왔다.
한국 홀로 단호한 조치 다짐
대통령의 국제 평화 걱정은 국정원의 관련 발표 당일인 18일에도 표명됐다. 대통령이 주재한 긴급 안보회의에서 참석자들은 "현 상황이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사회를 향한 중대한 안보 위협이라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하고 국제사회와 공동으로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22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한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는 한 발 더 나갔다. 추이에 따라 대통령이 말한 '단계적 대응조치'를 실행할 것을 다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북·러 협력의) 한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마지막에 공격용(무기 지원)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그 과정에서 러·북 군사협력에 대한 강력하고 실효적 조치가 이행되도록 동맹 및 우방국과 긴밀히 공조하게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럴 때일수록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8·15 통일 독트린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말은 생판 뜬금없었다.
여기서 짚어야 할 대목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우리 안보에 미칠 영향이다. '북한군 파병'에 안보 위협을 느낄 나라는 일차적으로 교전국인 우크라이고, 이차적으론 미국과 나토다. 개전 2년 8개월 동안 지지부진한 소강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크라 전쟁에 '북한 악재'가 더해진다면, 전세가 일거에 뒤집히지 않더라도 상황 악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과 나토가 국정원 발표 뒤에도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다.
대선일을 불과 보름 남겨 놓은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이란 전쟁에 이어 또다시 악재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크라에 단 1명의 미군도 파병하지 않았다"는 게 바이든 대통령이 거듭 강조해 온 성과다. 나토 역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의 거듭된 파병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돌연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국제 평화를 외치며 '단계적 조치'를 다짐하고 나선 꼴이다.
대선 앞 둔 미국은 여전히 침묵
한국 역시 '집단 서방'의 일원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요청에 따라 대러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당장 '평양 무인기 침범'과 '재발 시 자위권 발동'이라는 북한의 경고 탓에 한반도 안보가 흔들리고 있다. 현 상황에서 대통령이 한반도와 국제평화를 같은 수준으로 걱정하며 '모종의 결단'을 잇달아 시사하는 게 되레 한반도 안보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22일 브리핑에서 밝힌 것처럼 러시아는 △북한 핵의 완성도 제고와 △전략 미사일 고도화 △노후된 재래식 무기 현대화에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다.
일각에선 북한군이 우크라 전쟁에서 터득할 실전경험과 북한의 외화 획득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 같이 지엽적 관심이다. 북한군 최정예 특수부대가 우크라로 이동한다면, 그만큼 한국군이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고 마주할 북한 병력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단기적으론 되레호재다. 우크라 전쟁의 대세가 흔들려서 최악의 경우 러시아가 우크라 영토를 완정한다고 가정하자. 패권국가인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지언정 우리 안보와는 거리가 있다. 우크라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고, 대러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것도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이 할 고민이다. 러시아가 한국의 적대국이 되지 않는 한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다.
대통령이 뤼터에게 한 말을 짚어보면 여전히 '바이든의 주문'에 포획돼 있음이 드러난다. "인도·태평양과 대서양 안보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바이든 대통령의 논리다. 바로 그 논리로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 동아시아에서 연합훈련을 늘려 왔다. 또 세계를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로 양분한 뒤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강조해 왔다. 외교적 노력을 팽개치고 군사주의로 임기 4년의 대부분을 일관했다. 대화와 타협을 외면함으로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은 세월이었다. 바이든의 양분법은 미·러 간 대치 속에서 생각이 비슷한 국가들(LMCs)을 규합해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나서려는 큰 그림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바이든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3달 뒤엔 무대에서 사라진다. 대통령의 다짐은 종말을 향해 가는 '바이든의 질서'를 되살리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임기 3개월 남은 '바이든 노선' 추종
북한과 러시아-우크라 전쟁에서 결정적인 변수는 두 가지다. 전쟁이 러시아 대 나토의 전쟁으로 확산한다면, 우리 손을 떠난다. 미국과 나토가 우크라에 제공한 장거리 공격무기의 대러시아 사용을 허용하면 러시아가 설정한 금지선(red line)을 넘게 된다. 러시아는 이를 북·러 군사기술 협력의 문턱으로 제시해 놓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북한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에 서명한 뒤 공표한 방침이다.
다른 하나의 변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국이 우크라에 살상무기를 직접 지원한다면 한·러 관계 파탄을 경고했다. 우크라 전쟁 자체는 우리 안보에 별 영향이 없지만, 한국의 살상무기 직접 지원은 우크라의 불씨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는 초대장이다. 북·러 간 군사기술 협력이 본격화하면서 우리가 감당할 안보상의 부담이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국제평화를 향한 대통령의 '뜨거운 관심'이 빤히 눈에 보이는 금지선으로 다가가는 자충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크라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끝까지 아니어야 한다.
("뭣이 중한디"는 호남 방언으로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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