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북한군 러시아 파병 발표 5일 만에 마침내 한미 간 평가가 접근했다. 차이도 드러났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23일 북한 병력이 러시아에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참전한다면 심각한 문제"
이탈리아를 방문 중인 오스틴 장관은 이날 로마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병력을 러시아에 보낸 증거가 있다"라면서 그러나 병력 배치 목적은 아직 분명치 않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군의 러시아 이동을 공식 확인한 건 처음이다.
오스틴은 "북한군이 러시아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더 알아봐야 한다"라면서 "계속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일 북한이 러시아와 공동 교전국이 된다면, 그들의 의도가 러시아를 대신해 참전하는 것이라면, 매우, 매우 심각한 문제"라면서 "유럽뿐 아니라 인도·태평양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북한이 병력 배치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 분명치 않지만, 이란과 북한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러시아 군 전력이 중요한 약점을 노출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와 북한은 국정원 발표에 대해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앞서 베단트 파텔 국무부 부대변인은 22일 브리핑에서 "미국은 특정 정책 영역과 관련해 '어떤 것을 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 전에 자체 (확인)과정과 평가를 거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북한 특수부대 러-우크라 전쟁 참전 확인'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군의 참전을 단정적으로 공개한 국정원과 사뭇 다른 관점이다. 오스틴은 북한군의 참전을 미확인 사실로 두고,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미는 발표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미국은 국방장관이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언론의 질의에 답변했지만,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내놓고 여론을 휘저어놓고 닷새 동안 어떠한 언론 질의도 받지 않았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지난 21일 "북한군이 우크라에서 싸우기 위해 러시아에 배치되고 있다는 보도를 유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발표 방식도 한국과 달라
조태용 국정원장은 23일 국회 정보위 간담회에서 러시아로 이동한 북한군 규모가 대략 3000여 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지난 18일 발표 당시 인원의 두 배가 된 것으로, 국정원은 러·북 간 계획한 1만여 명의 파병이 이뤄지는 시점을 12월쯤으로 예상했다. 정보위 여야 간사인 국민의힘 이성권,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은 배경 설명을 통해 이같이 전했다.
국정원은 북한군의 러시아 이동 목적에 관해서도 '보도자료' 제목과 달리 북한군이 실제 (우크라) 전선에 파견돼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해 최종 결론을 유보했다. 그러나 이, 박 의원의 전언에 조 원장이 지난 18일 단정적인 보도자료를 내놓은 이유, 그동안 침묵했던 이유를 밝혔다는 말은 없었다.
다만 보도자료에서 밝힌 대로 북한 미사일 개발 총책인 김정식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이 우크라 전선에서 현지 지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전했다. 북한군 최정예 폭풍군단(11군단) 1만여 명이 파병될 것이라는 첩보는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국정원은 보고 있다고 전해졌다.
국정원은 북·러가 지난 6월 체결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체결하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현 국가안보회의 서기)이 방북한 뒤 파병 절차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유사시 상호 군사지원'을 약속한 제4조가 원용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파병 의도에 대해서는 △북·러 군사동맹의 고착화 △유사시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 유도 △경제난 돌파구 마련 △북한군 현대화 가속 필요성 등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연합뉴스는 북한군 병사들은 1인당 월 2000달러(약 277만 원)의 보수를 받게 된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장, 발표 닷새만에 국회 출석
폭풍군단 파병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한 내부에서 병사 가족을 중심으로 동요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국정원은 "선발된 군인 가족들이 오열한 나머지 얼굴이 많이 상했다"라는 말이 돌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이 철저한 입단속과 함께 파병 군인 가족을 모처로 집단 이주, 격리하는 정황도 포착됐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은 한국어 통역 자원을 대규모로 선발하고 있다는 동향도 보고됐다. 북한군 병사들에게 군사 장비 사용법과 무인기 조종 등 특수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게 확인됐다고 보고됐다. 북한군 훈련에 참여한 러시아 교관들은 병사들이 체력과 사기는 우수하지만, 드론 공격 등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전선 투입 시 전사자가 다수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로써 미국 국방부와 국정원 국회 보고를 통해 북한군 파병에 대해 보다 자세한 사실과 정황이 드러났다. 그러나 우크라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로 옮겨오지 않도록 '방화벽'을 쌓아야 한다는 절대명제는 바뀌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21일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과의 통화에서 "러-북의 군사적 밀착이 인도·태평양과 대서양 지역 안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신시켰다"고 단정했다. 오스틴은 그러나 북한군의 우크라 전쟁 참전을 전제로 "유럽뿐 아니라 인·태 지역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의미를 제한했다. 문제는 정부의 성급한 단정이 향후 그동안 유보해 왔던 우크라 살상무기 지원 등의 '단계적 조치'로 이어질 경우 한·러 관계의 파탄은 물론, 그야말로 한반도 안보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절실한 '우크라 방화벽'
외교부는 북한군 러시아 이동의 원인이 규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21일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 댓바람에 '북한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지노비예프 대사가 전한 러시아 정부의 공식입장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러·북의 협력이 대한민국의 안보 이익에 반하지 않으며, 국제법의 틀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러 조약 제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 국가 또는 여러 국가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할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자위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해 지체없이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중 조약처럼 유사시 무조건 지원이 아닌, 유엔헌장 51조·러시아법·북한법 등 삼중 검토를 거치게 돼 있다. 조약 체결 뒤 언론성명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양국 관계가 '동맹의 높은 단계'로 격상됐다"고 강조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동맹'이라는 표현을 피하면서 제4조와 관련, "일방이 침략받는 경우 상호지원을 약속했다"고만 강조했다. 지노비예프가 우리 정부에 전한 공식입장에 대입하면, 아직 러시아가 '선'을 넘었다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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