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향해 반보 전진했다. 나머지 반보는 러시아가 채워야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평화유지군 파병과 영토 양보 문제 등 핵심 현안이 남아 있지만 일단 협상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이끈 미국 협상단과 우크라 협상단은 30일간 즉각적인 휴전과 미국의 대우크라 군사 및 정보 지원 재개 등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우크라, 안전보장안 제시···비공개
성명은 또 휴전 기간 전쟁 포로 교환과 민간인 석방 및 러시아로 옮겨진 우크라 어린이들의 귀환 등 인도적인 구조 노력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양국 대통령은 또 지난달 28일 백악관 격론 뒤 취소했던 미-우크라 광물협정 조인식을 가급적 빨리 결론 짓기로 합의했다면서 우크라 광물자원 개발은 우크라의 경제 발전과 장기적인 번영과 안보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의 핵심은 미국이 제안한 30일 전면적인 휴전 합의다. 육해공 전 전선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럽 회원국과 우크라가 최근 공개적으로 밝힌 '공중과 해상, 제한 휴전' 안에서 반걸음 나간 것이다. 우크라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날까지만 해도 제한적인 휴전 방침을 확인했지만, 미국 요구를 수용했다. 루비오 장관은 성명 발표 뒤 "이제 공은 러시아 쪽에 넘어갔다. 우리는 그들이 평화에 동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동의한다면 며칠 내로 휴전이 성사될 것"이라는 게 그의 예상. 우크라 측이 요구하는 장기적인 안보 보장안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지만,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 대통령실 실장은 12일 텔레그램에 "우크라는 러시아가 동의한다면 30일 휴전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이는 안보보장 및 평화협정의 최종 조건 준비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조치"라면서 안보보장에 방점을 두었다.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쟁을 어떻게 종식할지 실질적인 세부사항과 함께 우크라에 대한 장기적인 안전보장 방안도 논의했다"라면서 우크라 대표단이 구체적인 제안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우크라의 제안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종전협상 이제 반걸음, 공은 러시아에
지난달 28일 미-우크라 백악관 정상회담 결렬 뒤 '평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강조했던 미국은 만족을 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회담 뒤 워싱턴에서 기자들에게 "주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소통할 것"이라면서 "푸틴도 동의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을 다시 백악관에 초청할 것이냐는 언론 질문에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리야드 미·러 장관급회담에 참석했던 스티브 위트코프 미 중동특사가 먼저 모스크바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트코프 특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외교적 결례 논란을 일으켰던 백악관 격론 뒤 사과 편지를 보내왔다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러시아는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앞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1일 브리핑에서 위트코프의 방러와 관련 "미국과의 양자 접촉은 현재 상당히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장미빛 색안경을 서둘러 쓰지 말아야 한다"라면서 "우리는 늘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전선에서 승세를 굳히고 있는 만큼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평화협상의 양대 쟁점은 영토 확정과 우크라에 대한 안보보장 방안이다. 러시아 측에서는 우크라 내 러시아계 주민들의 안위도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이중 우크라가 요구해 온 나토 가입과 1991년 영토 복원을 "비현실적"이라고 단언했다.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평화유지군 파병에 굳이 반대하지는 않되, 미국은 참가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유지하고 있다. 필요하면 유럽이 하라는 것. 미-우크라 광물협정 체결 뒤 이뤄질 경제협력이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려는 '임의의 국가들'의 해법보다 우크라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노(NO) 나토-노 군사기지-노 군사작전
러시아는 종전 자체보다 전쟁의 원인 제거를 최우선시하면서 우크라의 나토 가입 문제는 물론, 나토 평화유지군의 우크라 주둔에도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종전 방안에 대한 러시아의 의중은 지난 12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이 미국인 블로그 저널리스트들과 가진 인터뷰 전문에 담겨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인식하듯이 나토 확장이 전쟁의 원인이라면, 나토군의 우크라 주둔은 똑같은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크라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킨 건 서방임을 강조하면서 "병력이건 그룹이건, 러시아를 적으로 선언한 국가들로 구성된 존재는 어떤 조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대통령이 "일단 싸움이 멈추면 한 달 내로 평화유지군이 배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그들(유럽)은 '우크라 없는 우크라'는 절대 안 된다면서도 '러시아 없는 러시아'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독일 정보기관 수장은 이제 2029년까지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라면서 "(그때쯤 임기가 끝날) 트럼프를 배제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라브로프가 나토의 대안으로 제시한 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P5)과 독일, 튀르키예 등의 안보보장이다. P5에 영국과 프랑스가 포함되지만 '나토' 깃발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된 2022년 4월 초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서명 직전까지 갔던 평화협정안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라브로프는 우크라가 초안을 작성하고 러시아가 동의한 협정 초안에는 "노(No) 나토, 노 군사기지, 노 군사작전"의 원칙이 분명하게 명시돼 있었다"라는 것. 이스탄불 평화협정은 보리스 존스 당시 영국 총리의 키이우 방문과 때맞춰 서방언론이 터뜨린 '부차 학살' 보도 속에 무산됐다. 당시 평화보장 주체로 'P5+독일+튀르키예'에 국한하지 않고 희망하는 나라들의 참가 가능성을 열어놓았었다.
루비오 "중국 평화유지군 참가 환영"
루비오는 지난 10일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평화유지군의 문호를 개방하자는데 동의했다. 그는 중국의 평화유지군 참가 가능성을 묻는 말에 "우리는 평화의 명분을 확대하려고 희망하는 모든 나라, 특히 중국처럼 강한 나라의 참가를 희망한다"라면서 "다만 아직 그 문제는 아직 제기되지도 않은 만큼 대화(종전 논의)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라브로프는 트럼프의 그린란드 욕심에 빗대 "러시아 안보에서 우크라의 중요성은 미국 안보에서 그린란드의 중요성보다 몇 배 크다"고 말했다.
영토 문제는 그나마 예측이 쉬운 부분이다. 러시아군과 우크라군의 현재 점령지가 경계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22년 9월 30일 러시아에 합병한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4개 주의 영토를 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푸틴 대통령은 특히 돈바스 지방(도네츠크, 루한스크)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전쟁의 목표에서 후퇴하지 않았음을 거듭 강조해 왔다. 헤르손과 자포리자 주에서는 러시아군이 드니프로강 이남만 점령하고 있다. 루비오는 영토에 관해 "러시아가 우크라를 모두 정복할 수 없듯이 우크라가 2014년 영토 수준으로 러시아군을 몰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전망을 내놓았다. 러시아가 주장해 온 또 다른 전쟁의 목표는 우크라의 '탈나치화' 문제도 종전 협상에서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크라의 확약이 필요한 데다 자칫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은 주제다.
라브로프는 우크라 점령지 안에도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크라 정부의 러시아어 언론매체 및 문화 매체 폐지, 언론인 실종, 돈바스 주민들에 대한 전쟁범죄 등을 비난했다. 우크라는 친나치 민족주의 성향의 반데라주의 뿌리가 깊은 나라다. 우크라 내 러시아계 주민 박해를 제도적으로 차단할 탈나치 조치 역시 러시아가 중시하는 평화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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