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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펜 판결문 속 '두 알의 진주' 국민 신뢰 훼손 & 법 앞의 평등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5. 4. 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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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둔 시점에 지지율 1위 후보의 피선거권이 법원의 1심 선고로 박탈됐다. 멀리 21년 전에 벌어진 사안에 대한 판결이었다. 재판부의 논리는 '대중의 신뢰'와 '법 앞의 평등'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잣대에 의해 결정됐다. 파리 형사법원이 31일 프랑스 우파 포퓰리즘 정당 국민연합(RN)의 지도자 마린 르펜에 대해 내린 판결의 논리이다. 두 가지 명분은 모두 한반도 남쪽 거주민에게 지극히 낯설다. 왜 그럴까?

​프랑스 우파 포퓰리즘 국민연합(RN) 지도자인 마린 르펜이 31일 유죄 판결을 받고 파리 형사법원을 떠나고 있다. 2025.3.31. AP 연합뉴스

르펜과 그의 RN은 반이민·반무슬림·반유럽통합·반세계화에 기독교 국가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수십년 동안 길거리로 뛰쳐나간 노동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지켜주던 진보정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폐허에 포퓰리즘이 창궐했다. 거리마다 세계화의 희생자들이 넘쳐나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물가고에 기성 정당의 엘리트는 건재하건만 서민의 삶은 갈수록 어렵다. 글로벌 현상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필두로 인종주의의 색채를 띄면서 슬글슬금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다는 진단도 새롭지 않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현상이 비슷하다고 해서 각국의 대응까지 유사한 건 아니다. 나라마다 지나온 내력과 국가를 지탱하는 사법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었다. 특히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는 상당한 차이를 낳는다. 르몽드가 전한 판결문을 먼저 들여다보자.

혐의는 르펜이 유럽의회 의원 시절(2004~2016) 의원 보좌관 봉급 명목으로 돈을 받아 국민전선(FN·현 국민연합·RN) 당직자 임금으로 유용했다는 것. 사적으로 착복하지는 않았다. 1심 재판부는 르펜에 징역 4년(2년 유예·2년 전자팔찌 착용 가택연금), 벌금 10만 유로(1억 5000만 원), 5년간 피선거권 박탈 형을 선고하고, 피선거권 박탈을 즉시 발효했다.

프랑스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도. 2023년 44%에 불과했다. 2025.4.3. [Statista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재판부는 "유럽의회가 민주적 토론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지급한 공금을 당파적 목적에서 유용하는 정교한 수법으로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유럽연합(EU) 시민, 특히 프랑스 유권자들에게 정당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판시했다. "지속적인 범법 행위로 유럽과 특히 프랑스의 민주적 규칙과 공직생활의 투명성을 심각하게 위배했다"고 덧붙였다. '대중의 신뢰'를 적시한 대목이다. 프랑스 선거법은 최종심 전이라도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이에게 피선거권 즉시 박탈 권한을 재판부에 주고 있다. (제45조) 단 사유를 명시해야 한다. '법 앞에 평등' 논리는 피선거권을 즉각 박탈한 사유에 등장한다.

변호인들은 피선거권 박탈이 르펜의 대선 출마를 막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라면서 "항소 효력을 박탈하고 무죄추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결문은 "피고인(르펜)이 두 차례 대선 후보였고, 2027년 대선에서 출마하겠다고 밝힌 만큼 피선거권 박탈이 미칠 영향을 무시하지 않았다"라면서도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둥'인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명토 박았다. 이어 "(피선거권 박탈로) 유권자의 선택권을 제한했을지라도 유권자 일부가 아닌 프랑스 국민 전체를 대신해 내린 형사 판결"임을 강조했다. "재판부가 법을 해석할 때 사회적 합의를 구해야 하는 요건을 무시해서도 안 되며, 무시할 수도 없다"라면서도 "공감대를 구할 계급이 "예를 들어 정치적 계급일지라도 (전체) 계급의 공감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 공공서비스 만족도 조사. 맨 오른쪽의 대한민국 사법서비스는 만족도가 응답자의 26%로 OECD 평균(55.7%)의 절반도 안 됐다. 프랑스는 같은 조사에서 55%였다. 2025.4.3. [OECD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한국리서치의 2020년 사법부 판결 신뢰도 조사에서 응답자의 48%는 인간 판사 대신 인공지능(AI) 판사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인간 판사를 선택한 응답자는 39%였다. [한국리서치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로 결정토록 하자는 변호인의 논리가 "선출직 공직자 또는 대선 후보로서 피고의 신분에 따른 특권 또는 면책에 주장하는 것으로 법 앞의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면서 선출직 공무원은 어떠한 면책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르펜의 범죄가 최고 10년 징역형에 더해 10년 자격상실 형을 받을 수 있는 공금 횡령임을 상기시켰다. 현직 판사 벵상 시재르는 31일 르몽드 기고문에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이 비롯된 시점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으로 못박으면서 "누구도 제도로부터 예외라는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모두 21명(RN 유럽의회 의원 9명·보좌관 12명)이 연루된 범죄에서 르펜을 '우두머리'로 적시했다. 판결 뒤 재판부에 대한 비난과 실명을 거론한 위협이 프랑스 소셜미디어(SNS)에서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해 각국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르펜을 옹호하는 '반동주의 국제 연대'도 등장했다. 프랑스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 역시 흔들리고 있다.

2013년 이후 44~48%로 "신뢰한다"는 응답자가 절반이 안 된다. 그나마 사법 서비스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55.7%)에 근접한다. 2022년 행정·교육·보건·법률 분야 공공서비스 만족도 조사에서 55%였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까. OECD 같은 조사에서 26%였다. 행정 75%(평균 62.9%), 교육 68%(평균 66.8%), 보건 74%(평균 67.7%) 등 조사항목 4개 가운데 유일하게 평균치에 미달했다. 한국리서치 2020년 조사에서 법원 판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고작 29%였다. 판사에 따라 범죄자 형벌이 달라진다는 응답이 86%였다. 오죽하면 인공지능(AI) 판사를 선호하겠는가. 응답자 48%가 AI판사를 선택했고 인간 판사는 39%에 불과했다.

프랑스 우파 포퓰리즘 정당 국민연합(RN)의 실질적 지도자인 마린 르펜(왼쪽)이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열린 집회에서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르펜의 피선거권 박탈로 29세의 바르델라가 2027년 대선에 대신 출마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2024.6.2. AP 연합뉴스

대한민국 사법부가 잘 하는 게 있기는 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OECD 회원국 37개국을 대상으로 한 사법부 신뢰도 조사결과에서 한국은 꼴찌를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른 조사 대상국과 달리 검찰과 교정당국도 사법부에 속하기 때문에 법원에 대한 신뢰도 조사로 보기 어렵다"는 이의를 제기, 최종 보고서에서 빠졌다. 역시 하위권이던 2017년에도 같은 이의 제기로 최종 보고서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2·3 계엄은 검찰과 법원 모두에 약간이라도 신뢰를 회복할 기회였건만 '역시나'였다. 내란 수괴 피의자를 보란듯이 석방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지귀연 부장 판사)의 판결과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받아들인 검찰의 행태는 대통령 윤석열 1인을 '법 앞의 예외'로 만들었다. 그 결과 내란 주요임무 종사 피의자인 군장성들이 수감된 가운데 내란 수괴는 풀려나는 초현실적인 상황이다. 국민과 세계가 쿠데타의 현장을 목도했음에도 결정을 미룬 헌법재판소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운운하는 건 사치스러운 일. 만인이 뻔히 보고 들은 것도 믿을 수 없는 절대 불신 사회로 가고 있다. 

파리 형사법원의 판결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하건만 한국적 법 현실에선 너무도 낯선 개념을 재발견해서다. 르펜은 1심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회(하원) 의원직을 즉각 잃지 않는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도 유죄판결을 받으면 의원직을 내놓아야 한다는 게 판례를 분석한 프랑스 법조계의 결론이다. 파리 항소법원은 르펜에 대한 판결을 내년 여름까지 종결, 대선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할 방침이다. 르펜(56)에 대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현재로선 2032년 대선에나 출마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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