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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워싱턴리포트

사르코지의 화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25.

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국가 간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지만 이달 초 미국을 방문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는 숱한 화제를 자아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사르코지는 할리우드의 예찬론자이자, 친미주의자이다. 좌파와 우파를 불문하고 2차대전 이후 미국에 대해 삐딱하게 나갔던 프랑스 외교를 U턴한 셈이다. 특히 지난 7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28차례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에 공공연하게 반대함으로써 뜨악해진 양국관계가 화려한 르네상스를 열고 있음을 웅변했다. 하지만 사르코지의 방미 언행에서 친미 코드만을 읽어낸다면 절반의 독서에 그칠 것이다. 사르코지의 외교적 언사는 통으로 씹어봐야 제맛을 알 수 있다.

그의 의회 연설은 역사책을 샅샅이 뒤져 프랑스와 미국이 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강조하는 데 방점을 배치했다. 사르코지는 2차대전과 이후 마셜 플랜의 은혜를 거론하면서 “우리 세대 누구나 이를 잊는 것은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외정책에서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강조하고 이란 핵개발에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그가 거론한 국제현안에는 정작 알맹이가 쏙 빠졌다. 리비아와 북한, 팔레스타인, 레바논, 수단, 차드를 거론하면서도 끝내 이라크만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주목되는 것은 그의 화술이다. 상대를 한껏 띄우면서도 할 말을 하는 능란함이 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숨진 20세 미국 청년의 당시 편지를 인용하면서 슬며시 현재형 동사로 넘어왔다. “한 명의 미군 병사가 지구 어딘가에서 숨질 때마다 미군이 프랑스에 한 것을 상기하면,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픔을 느낀다”고. 이라크를 연상한 미 의원들은 당연히 일어나 박수세례를 퍼부었다.

그렇다고 사르코지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던 소신을 굽힌 건 아니다. 시라크와 마찬가지로 근거가 희박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다만 우방국의 반발을 야기한 시라크의 반대방식을 비난해왔다. 미국의 기업가정신을 치켜세우면서 투기자본주의의 횡포를 지적하기도 했다. 미 의회의 반감을 사고 있는 중국의 위안화 환율 정책을 먼저 지적하더니, 곧바로 대서양관계의 핵심쟁점인 달러화 환율을 지적했다. 부시 행정부가 거북해하는 지구온난화와의 싸움에 미국이 나서줄 것을 당당하게 주문하기도 했다.

단계적 접근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사르코지의 외교는 사실 바캉스철에 시작됐다. 지난 여름 휴가지를 부시가(家)의 별장이 있는 메인주 케네스벙크 인근으로 선택, 먼저 정상 간 사적관계를 텄다.

사르코지의 대미외교는 매끄럽다. 감쪽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정상 간 첫 만남의 썰렁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국민의 정부나, 대선유세 때는 ‘반미’에 올라탔다가 미국에 와서 돌연 친미로 돌아선 참여정부의 대미외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술이다. 한국은 아프간은 물론 이라크에까지 파병을 하고, 먼저 자유무역협정(FTA)을 꺼냈으면서도 이런 밀월을 경험하지 못했다. 비핵화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현안이다. 북한의 족쇄에 묶여 소신도, 타산도 내 줄 필요는 없다. 친미 외교도 하기 나름이다. 사르코지는 ‘좋은 동맹’을 위해 영혼까지 팔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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