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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의 조화(弔花)

칼럼/여적

by gino's 2012. 1. 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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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이나 분향소에 놓는 조화는 언제부터인가 망자와 산 자의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는 수단이 됐다. 그래서인지 헝겊 리본에 개인의 이름은 무슨무슨 학교나 기업, 기관명 뒤에 슬그머니 따라붙을 뿐이다. 그제 오후 고문의 대명사로 악명이 높던 서울 용산구의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15호실 앞에 놓인 조화 바구니에는 이름이 없다.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는 기관명이 있을 뿐이다. 지난달 30일 고문 후유증으로 64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추모하고, 경찰의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하는 반성의 취지가 담겼다. 
 

경향신문 DB

김근태 고문의 사망 당일, 소셜네트워크 위키트리에서는 경찰관들 사이에 진지한 토론이 벌어졌다. ‘한 사람의 경찰관으로,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상식인’으로 망자가 고문을 받았던 옛 대공분실에 분향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 이준형 경위의 글이 도화선이 됐다.

“국가는 오로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경찰관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국민 편에 서야 한다”는 상식이 칼을 들었고, “어쩔 수 없이 고문을 해야 했던 시대적 아픔을 갖고 있었던 선배 경찰이 불쌍하다”는 상황논리가 맞섰다. “그 선배들에게 구타당하고, 감금당하고, 불구가 된 국민보다는 불쌍하지 않다”는 질책도 이어졌다. “아직도 국민들에게 백안시당하며, 당연히 받아야 할 긍지와 권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후배들보다는 불쌍하지 않다”는 항변에는 낙인찍힌 자의 억울함이 뭉쳐 있다. 

인권센터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매년 박종철씨의 기일에 그의 아버지가 와서 아들이 사망한 방에 잠시 앉아 있다가 간다”면서 그 허허로운 눈빛 앞에서 당시 치안상황이나 경찰의 국가보위 임무, 어쩔 수 없는 명령이라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언했다.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압력에 굴복해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용기”를 강조하는 목소리에는 정의로운 항명의 결의가 배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꾸었다고 인권경찰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지시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상명하복의 경찰관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못할 짓은 할 수 없다는 양심이 솟아날 때 진정한 인권경찰로 거듭나는 것이다. 남영동의 조화가 그 약속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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