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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산책

마크롱의 승리? 프랑스 대선 결과 뒤집어보기

by gino's 2017. 4. 25.

보기에 따라 다르다. 프랑스 대선 1차투표 결과를 놓고 세계는 서둘러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의 승리로 결론지었다.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의 프랑수아 피용을 필두로, 중도좌파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 등 주요 후보들이 중도 ‘전진!(En Marche!)’의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선투표는 벌써 끝난 듯한 분위기다. 유럽연합(EU)과 국제자본시장을 비롯해 세계화체제를 지탱하는 제도(establishment)들이 경쟁하듯이 마크롱 지지를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1차투표 결과를 뒤집어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프랑스 대선 1차투표에서 24%에 가까운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한 중도 ‘전진!’의 후보 에마뉘엘 마크롱이 4월23일 파리 시내 선거본부에서 왼손 엄지를 들어올려보이고 있다. 경제장관 취임 3년, 사회당 탈당 8개월만에 대선 결선투표에 나가게 된 그는 벌써부터 당선이 된듯한 말을 하고 있다. _ AP연합뉴스

 

 

득표율 1위와 4위 차이가 고작 4.2%, 누구도 압도하지 못했다

 

극우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는 유권자 21.43%를 득표했다. 1972년 창당 이래 최대 기록인 770만명의 표를 얻은 것이다. 2002년 역시 결선투표에 진출했던 FN의 장마리 르펜이 기록한 득표수는 553만표였다. 주류 정치권의 중도 좌·우파 정당이 몰락하는 동안에 220만명이 불어난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실업률이 높은 북부 및 서부 산업지대는 르펜의 텃밭으로 변했다. 기존의 남불지역에 더해 대서양 연안의 보르도 지방의 해안지역은 물론, 피레네 산맥에 가까운 내륙도 넘어갔다. 사회당의 수십년 아성인 북부 릴과 중도우파의 표밭이었던 남부 니스가 FN에 넘어간 것은 중도 좌·우파 정당의 몰락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특히 르펜에 높은 충성도를 보인 북부·동부·남부에서 마크롱은 맥을 쓰지 못했다. 1차 투표의 득표율 지도를 보면 마크롱은 파리와 수도권(일-드-프랑스) 지역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세를 굳히고, 북부·동부·남부를 제외한 내륙지역 곳곳에서 분산된 지지를 받았다. 표의 지역적 밀집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4월23일 프랑스 대선 1차투표의 후보별 유권자 분포도. 황토색이 민족전선의 마린 르펜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곳이고 중도 에마뉘엘 마크롱은 청색, 장 뤽 멜랑숑은 보라색이다.   황토색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br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캡처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4월23일 프랑스 대선 1차투표의 후보별 유권자 분포도. 황토색이 민족전선의 마린 르펜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곳이고 중도 에마뉘엘 마크롱은 청색, 장 뤽 멜랑숑은 보라색이다. 황토색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프랑스 국민 두명 중 한명,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Un autre Monde est possible)”
 
막판에 군소후보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돌풍을 일으키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 앵수미즈)’의 장 뤽 멜랑숑 후보는 19.62%를 얻었다. 마크롱 스스로 벌써부터 대통령이 된 듯한 언행을 보이고 있지만, 기실 득표율은 23.86%에 그쳤다. 4위 멜랑숑과의 지지율 격차는 4.24%로 미미하다. 한국처럼 과반수와 상관없이 1위가 대통령이 되는 선거제도라면 마크롱은 국민 4명 가운데 1명의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다. 노동자, 농민이 환호해야 할 후보였지만, 정작 북부·동부의 러스트벨트(산업황폐화 지역)는 르펜에게 넘어갔다. 중부 및 남부 지역에 지지기반이 골고루 퍼졌다는 데 만족해야할 것 같다.

 

전국민 기본소득 공약을 제시했던 사회당 좌파의 브누아 아몽(6.35%)을 포함하면 르펜과 멜랑숑 등 세계화의 불만세력들의 득표율은 47.40%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장한 마크롱과 피용(19.94%)의 43.80% 보다 오히려 더 많다. 멜랑숑이 결선투표에 나갈 경우 지지하겠다고 미리 선언했던 아몽의 지지층은 멜랑숑의 지지층과 대부분 겹친다. 마크롱의 승리는 그야말로 신승일 뿐이다. 기성 정계 및 엘리트들이 선거 전반에 걸쳐 조장해온 극우 경계심리에 기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승리다.

 
포퓰리즘의 확산, 애써 외면하는 주류사회
 
중도 마크롱의 축배 뒤에는 포퓰리즘의 확산이라는 현실이 놓여 있다. 자본시장과 프랑스 국내외 제도들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거나 의미를 내리깎고 있다. 르펜과 멜랑숑만 합해도 41.05%였다. 기성 정치권의 다소 성급한 축배는 현실을 흐리려는 의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기에 처한 생태문제와 관련해 르몽드와 그린피스 가운데 어느 쪽을 믿나. 에너지 문제에서 국영 프랑스2 방송과 내셔널지오그래픽 중에서 어느 쪽을 믿나.” 

 

지난 23일 프랑스 대선 1차투표에서 4위로 탈락한 좌파연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 앵수미즈)’의 장 뤽 멜랑숑이 투표 직전에 주요 신문·잡지·TV·라디오 매체들을 프랑스가 직면한 현안에 비유하며 내놓은 발언이다. 멜랑숑으로부터 적어도 생태문제와 관련해 불신을 받은 르몽드는 그러나 23일자 사설에서 이번 대선의 의미를 추수하면서 ‘멜랑숑 효과’에 주목했다. 

 

르몽드는 이번 대선의 핵심은 국가 정체성이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감정의 재발견’이었다고 짚었다. “세계화에 따른 자유무역이 전반적인 빈곤을 줄이지만, 동시에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감정이 특히 중산층 사이에서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세계화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아니라면 멜랑숑에 쏟아진 열광적 지지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도 분석했다. 

 

“공화국이 점령당했다.” 대선 1차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23일 밤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파리 시내 공화국광장에 폭동진압 경찰관들이 주둔해 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거센 항의로 소란이 있었다. 파리/EPA연합뉴스

“공화국이 점령당했다.” 대선 1차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23일 밤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파리 시내 공화국광장에 폭동진압 경찰관들이 주둔해 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거센 항의로 소란이 있었다. | EPA연합뉴스

 

마크롱은 법인세를 33.3%에서 25%로 낮춰 기업하기 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해고를 쉽게하고 중장년 노동자를 보호하는 대신 젊은이와 실업자들이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한다. 큰 틀에서 기업친화적이면서 노동·복지 문제는 아랫돌 빼서 윗돌 메우겠다는 사고다. 좌우 포퓰리즘이 국민의 절반 가까이로부터 지지를 받았음에도 ‘지금 이대로’ 갈 수 있다는 주류사회의 외눈박이 비전은 다음달 7일 결선투표는 물론, 향후 5년 프랑스 사회의 앞날을 그리 밝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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