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에 꽃길 만 걸어온 귀공자
에마뉘엘 장미셸 프레데릭 마크롱은 프랑스 북부 아미앵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의사였다. 중학교 교장 출신 할머니의 영향으로 정치에 투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파리의 명문 앙리4세 고교를 졸업한 그는 파리 10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DEA)까지 수료했다. 이후 프랑스 엘리트의 산실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을 거쳐 2004년 국립행정학교(ENA·에나) 스트라스부르 캠퍼스를 졸업했다. ‘전진!’의 대선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자기소개서의 첫 줄이 “나는 에나를 졸업했다(J‘ai fait l’ENA)”는 것이다. 기실 프랑스의 기성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시앙스포와 에나를 거쳤지만 많은 경우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유독 이를 강조한 데서 그의 선민의식이 엿보인다. 성장기에 10년간 피아노를 배웠고 격투기와 축구로 몸을 단련했다. 마크롱은 같은 자기소개서에서 “되돌아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안정된 환경에서 자랐다”고 인정하고 있다.
■금융시장의 인수합병(M&A) 귀재
에나를 졸업한 2004년(27세), 마크롱의 첫 일터는 프랑스 재정감독청(IGF)이었다. 자크 아탈리의 ‘프랑스 성장의 자유화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2008년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Rothschild&)로 자리를 옮겨 금융가로 변신했다. 에나 졸업생으로 10년 동안 국가기관에서 일하겠다는 계약을 했다. 이를 어겼기에 5만4000유로(약 6600만원)를 국가에 납부해야 했다. 마크롱은 네슬레의 화이자 유아 우유부문 재인수(90억유로 규모) 및 일간지 르몽드 매각 등에 관여했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손꼽히는 M&A 전문가로 성장했다. 2009~2013년 그가 신고한 소득은 280만유로(34억6000만원)에 달했다. 2012년 대선 직후 엘리제궁 대통령비서실 부실장으로 취임했다. 사회당 당적을 10년 간 갖고 있었지만, 정작 그가 당비를 납부한 것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뿐이었다.
잠시 공직을 떠났다가 2014년 8월(36세) 경제·산업·디지털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에 이어 반세기 만에 최연소 경제장관이었다. 정부를 떠난 기간 동안 금융컨설팅 회사와 토플시험 준비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사업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2년 뒤 대선출마를 위해 사회당 정부를 떠났다. 그는 경제장관 시절 ‘마크롱 법(Loi Macron)’으로 알려진, ‘성장과 (경제)활동 및 경제적 기회의 평등을 위한 법’을 제정했다. 친 기업적인 개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 경제의 성장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5년 발효된 이 법이 야기할 효과가 향후 5년 간 국내총생산(GDP)의 0.3% 정도라고 평가했다. 2016년 1월 그가 제출한 ‘새로운 경제적 기회들’을 마련하기 위한 ‘마크롱2 법안’은 폐기됐다.
마크롱은 사회당 우파의 전형적인 ‘캐비어 좌파’였다. 고급 수제양복을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입으로는 좌파의 가치를 말하는 프랑스 판 ‘강남좌파’였던 것이다. 그나마 ‘좌파’의 모자를 벗어 던지고 중도로 탈바꿈했다.
■‘올랑드2’인가, ‘슈뢰더2’인가
마크롱과 올랑드 대통령의 관계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2011년 사회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올랑드캠프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올랑드가 당선된 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2년 간 엘리제궁의 대통령 비서실 부실장으로 일했다. 올랑드가 정치적 대부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번 유세기간 동안 인기 없는 올랑드 정부와 거리를 뒀다. 소득 불균형과 부의 재분배 문제를 다룬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마크롱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비난해온 것이 그 때문이다. 피케티는 “올랑드 정부 경제 실패의 일급 책임자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질타했다.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경제장관이었던 마크롱은 2016년 4월 정치운동단체 ‘전진!’을 결성한다. 좌도 우도 아닌 또는 좌이기도 하고 우이기도 한, 초당적 정치를 표방했다. 마크롱의 변신을 두고 사회당 우파가 신자유주의개혁에 실패하자 ‘얼굴마담’을 바꿨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포린폴리시의 크리스토퍼 글라젝은 “마크롱의 성공은 리버럴리즘의 문제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 때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라면서 “사회당이 사실상 당을 해체하는 ‘정치적 자살’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사회당 우파의 중진들은 1차투표 전부터 사회당 대선후보(브누아 아몽)가 아닌 마크롱 지지를 선언했다. 올랑드는 1차투표 뒤 마크롱 지지를 표명했다.
마크롱의 공약도 많은 경우 올랑드 정부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노동시간은 현행 주 35시간제를 고수하되 기업 단위에서 탄력적으로 운영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부유세(ISF)를 상속 부동산에만 국한하고 기업 투자를 장려하며, 법인세 인하 및 사회보장세(CSG) 인상, 부가세(TVA) 현행유지 등을 약속하고 있다. 독일 사민당(SPD)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전격 실시해 성공한 ‘아젠다 2010’ 처럼 복지를 줄이고, 기업을 도와주는 개혁안들을 담고 있다.
■마크롱과 오바마
마크롱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희망’의 상징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마크롱은 오바마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오바마는 케냐 유학생과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흙수저’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외할아버지는 영업사원이었다. 하와이에서 사립고교를 나왔지만 로스앤젤레스의 2년제 옥시덴탈 칼리지에 들어가는 데 만족해야 했다.
더 큰 차이는 마크롱의 인생에는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기간이 없다는 점이다. 오바마는 컬럼비아대로 편입, 졸업한 뒤 시카고 지역공동체의 조직활동가로 일했다.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빈민운동이었다. 저소득층 자녀들의 대학시험 준비와 세입자들의 권리옹호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오마마는 또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지만, 마크롱은 어떠한 선출직에도 뽑힌 적이 없다. 국민의회(하원)의원에 출마하려다가 사회당 공천을 받지 못한 적은 있다. 오바마는 희망 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희망과 변화를 말했다. 하지만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변화’의 아이콘은 마크롱이 아닌 것 같다. 지난 24일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조사 결과 응답자의 47%가 마크롱이 아닌, 마린 르펜 FN후보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후보’로 꼽았다. 초선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워싱턴의 아웃사이더였지만, 마크롱은 10대부터 파리의 인사이더로 살아왔다. 정계 진출 전 오바마 주변에는 사회활동가와 법률가들이 많았다. 마크롱의 주변에는 금융·재계 인사들이 많다.
■‘잘난 대통령’과 ‘불편한 대통령’의 사이
마크롱은 올랑드 대선캠프의 젊은 금융가로 시작해 대통령 비서실 근무 2년, 경제장관 2년의 짧은 경력으로 대권을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다. 행운 덕분이었다. 당초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던 중도우파의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가 지난 2월 부패스캔들이 연루되면서 대안으로 떠올랐다. 1차투표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극우 포퓰리즘을 우려, 마지못해 그를 뽑는다는 소극적 지지자가 45~52%에 달했다. 마크롱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대목은 15세 때 처음 만난 고등학교 국어(불어)와 연극 교사였던 24세 연상의 브리지트(65)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브리지트의 딸 로랑스가 마크롱과 같은 반에 있었다. 막내 딸 티판느 오지에르(33)와 마크롱의 대선 유세를 돕고 있다.
잘생기고 잘난 이미지와 소탈한 서민 이미지가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 많은 경우 소탈한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다. 미국인들이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 대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를 선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히려 르펜이 서민대통령에 가깝다. 문제는 극우의 르펜이 적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그리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4월 26일 마크롱과 르펜은 모두 북부 아미앵의 월풀공장을 찾아갔지만 전혀 다른 장면을 연출했다. 내년에 폴란드로 공장이 옮겨가면서 290명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될 위험에 놓여있는 곳이다. 마크롱은 이날 오전 아미앵 상공회의소에서 노조지도자들과 먼저 만났지만, 르펜은 공장부터 찾아가 노동자들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뒤늦게 공장으로 달려온 마크롱은 주차장에서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노동자들이 친 기업 개혁의 신봉자인 마크롱을 내친 것이다. 르몽드는 월풀 공장 주차장에서의 두 장면이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라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