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유권자의 눈높이에 더 빨리,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극우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투표 진출이 확정된 다음날인 4월24일 곧바로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상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반면에 중도 ‘전진!’의 젊은 엘리트, 에마뉘엘 마크롱은 1차투표 승리 축하 저녁을 먹는 장면이 언론에 노출된 뒤 다른 활동현장을 트위터에 올려놓지 않고 있다. 르펜은 이날 국영 프랑스2 TV인터뷰에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FN의 당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 배수의 진을 쳤다. |마린 르펜 트위터
■안심할 수 없는 마크롱의 우세
프랑스 여론조사기관들이 1차 투표 때처럼 정확하게 결과를 예측한다면, 결선투표의 결과는 예상이 어렵지 않다. 마크롱은 60~64%의 득표율로 36~40%에 그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될 것으로 점쳐진다. 프랑스는 물론 각국의 기성 제도(establishment)들이 마크롱의 당선을 기정사실화 하는 근거이다. 1차 투표가 끝난 다음 날인 4월24일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 상승·프랑스 기업들의 주가 상승·프랑스 국채와 독일 국채의 수익률 격차 축소 등 자본시장의 3대 지표가 모두 호전됐다. 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 역시 예측이 어렵지 않다. 2002년 FN의 장마리 르펜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17.8%의 득표에 그쳐 82.2%를 얻은 중도우파 공화국연합(RPR)의 자크 시라크 후보에게 참패했다.
1차 투표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결선투표의 예상득표율을 보면 마크롱이 65%를 넘지 않는 가운데 마린 르펜은 4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15년 만에 유권자 10명 중 4명이 극우 후보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1차적으로는 2002년 결선투표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가 시라크를 지지했던, 좌우합작의 공화국 전선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르펜이 종래 중도우파의 영토를 파고 들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FN과 중도우파 지지자들의 수렴현상은 더 이상 이론적 가정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적인 삶’과 ‘가톨릭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르펜의 비전은 대 테러·이민·난민·치안 정책 분야에서 전통우파와 일치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24일 조사에 따르면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의 지지자 가운데 37%가 결선투표에서 르펜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63%는 마크롱에게 갈 것으로 조사됐다.
1차 투표와 마찬가지로 투표율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르펜의 지지자들은 80~90% 이상 결선투표장에 갈 것으로 점쳐졌지만 적극적 지지 보다는 소극적 지지가 많은 마크롱 지지자들의 투표율은 미지수다. 충성도와 기권율이 만들어 낼 경우의 수에 따라 이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MPOF)의 세르주 갤럼 연구원은 이변의 매직넘버를 ‘50.07%’로 제시한 바 있다. 르펜 지지자의 90%·마크롱 지지자의 65%가 투표할 경우 르펜의 득표율이 간신히 과반을 넘을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이다.
엘라브의 같은 조사에서 ‘공화주의 전통’에 대한 충성도는 좌파가 훨씬 강했다. 사회당 브누아 아몽 후보 지지자의 93%가 마크롱을 지지한 반면, 7%만 르펜을 지지했다. 극좌연대 장 뤼크 멜랑숑 지지자들은 77%가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을 찍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회당 지지자들의 3배가 넘는 23%가 르펜을 지지할 작정이다. 멜랑숑과 르펜의 경제, 유럽, 대외관계 공약의 싱크로율이 가장 높았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1차 투표 주요 후보들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를 종합한 판세가 엘라브의 경우 64% 대 36%로 마크롱 우세를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더욱 의미 있는 조사 결과는 극우 포퓰리즘의 확장성이다. 마크롱과 르펜 가운데 진정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후보로는 르펜이 47%로 앞섰다. 다시 말해 갈 길이 뻔한 마크롱의 친기업·개방 개혁이 프랑수아 올랑드 현 사회당 정부처럼 벽에 부딪힌다면 5년 뒤 대선의 승자는 르펜이 될 수 있음을 가늠케 한다.
향후 프랑스 정치의 지형도는 몰락한 사회당과 공화주의자들의 지지층을 누가 얼마나 빼앗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중도 좌·우파의 재구성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주목되는 대목이 바로 중도우파 지지층의 FN 경도 현상이다. 지난 4월20일 이슬람국가(IS)의 파리 샹젤리제 총격테러보다 규모가 큰 테러가 발생하거나 유럽연합(EU)이 터키와 맺은 난민협약이 깨져서 더 많은 난민이 프랑스로 들어온다면 르펜의 포퓰리즘은 저변이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마크롱의 중도개혁 결과에 따라 멜랑숑에 환호하는 유럽통합과 세계화의 희생자들이 좌파 포퓰리즘의 처마 밑에 들어올 가능성도 필연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대선 1차 투표 후보들 가운데 사회당 출신인 마크롱(23.86%)과 멜랑숑(19.62%), 아몽(6.35%)의 득표율을 합하면 절반(49.83%)에 육박한다. 가히 사회당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사회당의 적자인 아몽의 몰락에서 확인됐듯이 각기 다른 캠프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합집산의 혼란기에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국이 될 것을 예고한다.
중도 좌·우파의 몰락으로 입증됐지만 프랑스 정치에서 이념은 폐기처분된 지 오래다.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힘겹게 유지해온 프랑스식 ‘제3의 길’은 끝났다. 중도좌파 사회당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서 실천함으로써 우파의 아젠다를 뺐었지만 토니 블레어의 영국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독일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그 수명이 다했다. 오히려 좌우 포퓰리즘에 전통 좌파의 아젠다를 빼았겼음이 이번 선거과정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더 이상 좌우 구도는 없다. 이제는 중도와 극우 사이에서 또다른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중간 접점 찾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가 밟아온 길이기도 하다. 대혁명 이후 100년 동안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로 혼란을 겪은 뒤에야 탄생한 것이 좌우파의 중도가 합의를 이룬 작금의 구도였다. ‘잊힌 그들’을 대변하는 포퓰리즘은 더 이상 무시해도 좋을 세력이 아니라는 점이 입증됐다. 선거연대나 정치적 이해에 따른 거래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콩방시옹(convention·협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 이상 물타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멜랑숑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좌파는 좌파의 가치로 돌아가고, 우파는 우파의 가치에 충실하되 극우화를 경계해야 한다. 그럴 때 건전한 좌파와 우파가 새로운 콩방시옹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만의 전통도 아니다. ‘중간지대’를 선점하는 정치인이 시대를 열어간다. 어차피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정치적 회색지대에 있는 유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아래 모인 ‘레이건 민주당원’들이 그랬다면, 사상 첫 흑인대통령의 역사를 연 버락 오바마에게는 ‘오바마 공화당원들’이 있었다. 작금의 프랑스에선 르펜을 추종하는 ‘르펜 중도우파’가 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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