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주정부가 냉전 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실시한 핵공격 대피훈련이 벌어진 지난 달 1일 하와이 비상관리국 직원들이 호놀룰루 청사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호놀룰루 | AP연합뉴스
“국민 여러분,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인천·경기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북한이 장사정포와 미사일로 수도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휴일 아침 이런 문자메시지가 휴대폰에 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경우 늦잠을 자고 있거나 하루를 느슨하게 시작할 시간이다. 당장 어린아이들부터 잠에서 깨운 뒤 식수와 비상식량을 챙겨 어디론가 대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식구 중 일부가 밖에 있을 때 합류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각자 대피하는 게 좋은가. 애완동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순식간에 여러 가지 결정을 해야 한다. 그 허둥거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안전을 확보할 골든타임은 줄어든다. 지난 13일 아침(현지시간) 미국 하와이 주민들에게 벌어진 ‘실제 상황’이다. 가정주부 앨리슨 월리스(36)가 당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 ‘핵공포의 38분간 하와이에서 엄마로 있다는 것’에 그날 아침의 악몽이 담겨 있다.
‘탄도미사일 위협이 하와이를 향했다. 즉각 대피처를 찾아라. 이것은 연습(상황)이 아니다.’ 졸린 눈으로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본 월리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생각한 대피장소는 바로 욕실이었다. 가장 먼저 딸아이 방으로 달려갔다. 베개를 들려 욕실로 들여보내고, 욕조 물을 받기 시작했다. 강아지도 들여보냈다. 욕실이 크지 않아 애완용 친칠라는 포기해야 했다. 사무실에 나간 남편의 휴대폰이 불통이었다. 해서, ‘가족은 욕실에 대피한다. 당신도 벽이 두껍고 물이 있는 곳에 빨리 대피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초콜릿바가 눈에 띄어 챙겼다.
욕실에 앉아 있다 보니 서른 살이 넘도록 핵위협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서야 비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민방공 사이렌이 울리지 않은 사실이 이상해졌다. 휴대폰으로 SNS를 검색하다 “미사일 공격 경보는 오경보였다”는 연방 하원의원 툴시 개버드(민주)의 트위터 메시지가 보였다. 주당국의 비상 메시지 발송 15분 만에 올린 글이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주당국이 잘못을 시인하고 상황해제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은 38분 뒤였다. 그 시간 동안 주민 대부분은 실제 상황의 칼날 위에서 몸서리를 쳐야 했다. 윌리스 가족은 그날 응급약과 비상식량 등이 담긴 비상 키트와 생존배낭 및 방사선 감염에 대비하기 위한 요오드를 대량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또 아이를 설득해 가족끼리 대피훈련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의 ‘재난’을 겪은 뒤 내린 결정들이다.
하와이주의 ‘북한 미사일 공격 경고’는 결코 웃어넘길 소동이 아니었다. 미국 국민은 물론 한국과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 역시 가볍지 않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핵재앙에 대비하라는 전문가들의 충고도 쏟아진다.
미국인들이 댓바람에 북한의 핵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북한이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을 시험발사했을 때만 해도 안 그랬다. 알래스카 주민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북한 미사일보다는 (캠핑장을 공격하는) 순록이나 곰이 더 걱정된다”는 앵커리지 시장의 인터뷰가 회자됐다. 하지만 북한이 두 달 뒤 6차 핵실험이자 두 번째 수소폭탄 실험을 하고, 11월 말 ICBM 화성-15형을 시험발사하면서 미국인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화염과 분노’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경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괌 주위 포위사격’ ‘태평양에서 수소탄 실험’ 등을 공언한 북한과의 말의 전쟁과 함께 위기지수가 높아졌다. 미국과 북한 간 전쟁 확률은 25%(존 브레넌 전 CIA 국장)로 제시됐다. 하와이가 지난달 1일 주 전역에서 30년 만에 핵공격 대피훈련을 하게 된 배경이다. 여기에 지난 13일의 핵소동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거듭 환기시켰다.
목전의 평창 올림픽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 하와이의 북한 미사일 소동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즈음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방문할 북한 예술단의 구성 문제가 더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만 유독 ‘강 건너 불구경’이 된 인상마저 준다. 하지만 단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어려운 대목들이 있다. 우선 지난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의 결과,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미 양국의 인식이 뒤바뀌었다. 인식 차이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온 지난 20년 동안 계속돼왔다. 하지만 휴전선 너머 한국은 무겁게 받아들인 반면 태평양 건너 미국은 덜 무겁게 받아들여왔다. ‘하와이 소동’은 그 북한 위협의 인식차가 거꾸로 됐음을 입증했다. 국방당국들 사이에도 인식차가 있었다. 한국에선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가급적 과장해서 국방예산을 늘리려 했다면, 펜타곤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무시했다.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잠재적 위협으로 꼽았을 뿐이다.
미국에선 이제 오경보에 한 주(州)가 마비될 정도의 소동이 벌어진다. 일본의 지자체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가정한 대피훈련을 벌이고 있다. 훈련이 너무 잦아 북한의 선전효과만 높여준다는 반발을 사고 있을 정도다.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덜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지난해 2차례 실시했던 민방위훈련을 올해 4차례로 늘리고, 그중 2차례를 방공호 훈련이 아닌, 재난대피 훈련으로 한다는 것이 그나마 변화다. 무엇이 위협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자세인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 ‘공포에 의한 균형’이 이뤄진 뒤 핵전쟁의 위협은 사라진 듯했다. 세계를 다시 핵재앙의 악몽으로 초대한 것은 북한이다. 하와이의 평범한 30대 주부가 발견했듯이 핵위협이 없는 시대에 성장한 세대가 핵위협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를 불러온 것이다. 북한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노동신문은 16일 하와이 소동을 ‘웃지 못할 희비극’이라면서 “세상사람들은 핵몽둥이를 휘두르며 세상 못된 짓만 골라 하는 미국이 이제는 핵불벼락공포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조소한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북한 역시 자신들이 자초한 현실에 ‘인질’이 된 것은 마찬가지다. 각국의 핵전문가들이 하와이 소동을 눈여겨보는 까닭이다.
전문가들은 작은 재난과 핵전쟁 사이의 경계가 터무니없이 얄팍하다는 냉전의 경험에서 비롯된 우려를 쏟아냈다. 전쟁은 정치적 결정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기술적 실패 또는 인간의 실수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국의 의도를 오독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1983년 하반기 석 달 동안 상대방 의도에 대한 오독이 1번의 참사와 2번의 핵전쟁 위기를 겪게 했다. 그해 9월1일 소련은 자국 영공을 침범한 앵커리지발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 269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미군 첩보기로 오인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3주 뒤 소련 군사위성은 ‘미국이 5기의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오경보를 보냈다.
다행히 소련군 첩보장교가 군사위성과 달리 육상 레이더에 이상징후가 없는 점을 간파, 차분하게 대응함으로써 첫번째 핵전쟁 위기를 넘겼다. 두 달 뒤 위기는 더 위험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훈련(에이블 아처 83) 중 소련군은 나토 전폭기들이 적재한 가짜 핵탄두를 진짜 핵탄두로 오인했다. 대기중이던 헬기로 진짜 핵탄두를 실어와 무장했다. 미군 장성이 소련군의 비정상적인 무장 강화 움직임을 포착하고도 과소평가함으로써 전쟁위기를 비켜갔다. 한참 뒤에 기밀해제로 알려진 위기들이다. 핵을 갖고 있는 나라 간에 상호 불신이 짙을수록 오해의 소지가 많아진다. 작금의 미국과 북한처럼 불신이 깊어진 상태는 오해가 일어나기 좋은 토양이다.
오인은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하와이 소동은 경보시스템의 오작동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백악관은 하와이 주당국의 훈련으로 오인했다. 백악관은 성명에서 “대통령은 하와이주 비상훈련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순전히 주정부의 훈련”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심지어 미국도 사건들을 오독한다면, (유사시) 북한의 혼란은 훨씬 클 것”이라고 짚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핵과학자 비핀 나랑은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보내온 경보를 휴대폰으로 보고, 그 자리에서 북한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명령할 수도 있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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