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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트럼프와의 여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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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o's 2017. 12. 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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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반 이스라엘 반 시위 도중 분노한 주민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날 이슬람권 전역이 들끓었다. EPA연합뉴스

비로소 ‘트럼프와의 여정’이 시작됐다. 지난 1월 취임 이후 번번이 미국 민주주의의 제도들에 의해 막혔던 혈로가 12월에 접어들어 잇달아 뚫렸다.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 원칙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3대축(의회, 행정부, 대법원)이 모두 트럼프 편에 섰다. 지난 2일 연방의회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안을 통과시켰고, 이틀 뒤 또다른 축인 연방대법원은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의 즉각 발효를 승인했다. 행정부는 다시 이틀 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다고 선언했다. 이달 첫 6일 만에 트럼프의 주요 아젠다 3개가 관철된 것이다. 미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트럼프의 아젠다’와 함께 살아야 한다. 미국의 망토 안팎에서 살아가야 하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12월의 남자, 이틀 간격의 ‘3연타석 홈런’ 

미국 상원이 11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법인세를 현행 35%에서 20%로 파격적으로 내리는 감세안을 통과시킨 것은 ‘트럼프 반동’의 서곡이었다. 찬성 51 대 반대 49. 공화당 상원의원 52명 중에서 단 1명(밥 코커 외교관계위원장)만 이탈했다. 하원에서 이미 통과된 감세안은 올해안에 트럼프의 서명을 거쳐 확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감세안 통과는 트럼프가 취임 이후 연방의회에서 거둔 첫번째이자 가장 큰 성공이었다. 단순히 법안 하나의 통과라는 의미를 크게 뛰어넘는다. 트럼프로선 자신의 핵심공약이었던 오바마케어(환자보호 및 지불가능한 보건의료법안·PPACA) 폐지안이 지난 7월부터 석달 가까이 번번이 연방의회에서 좌절된 끝에 맛본 승리이기도 했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까지 트럼프가 부는 피리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의 작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형적인 충격요법이 먹혔다. 트럼프는 지난 9월5일 느닷없이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의 정책인 불법체류청년추방유예(DACA) 정책을 공식폐기하겠다고 공표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일부 의원들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아메리칸 드림’을 깰 수없다고 아우성을 냈다. 오바마는 “잔인하고 자멸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익히 예상됐던 워싱턴 주류의 반발이다. 

이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는 선언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는 선언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트럼프 행동수칙, ‘상대가 당황할 때 거래하라’ 

하지만 같은 달 13일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내 캘리포니아 리버럴를 대표하는 낸시 펠로시(캘리포니아) 하원 원내대표와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가 공화당 의회지도부와 함께 트럼프의 백악관 쇼파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환담을 나눴다. 트럼프의 거래에 응한 것이다. 거래조건은 민주당이 요구하는 DACA 폐지를 3개월 유예하고, 허리케인 하비 피해복구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연방정부 채무한도의 연장이었다. 감세안 통과과정에서 존 매케인(애리조나)·론 존슨(위스콘신) 등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마음을 돌린 것도 DACA의 유예였다. 충심으로 설득하거나, 지지를 구걸하는 것은 애당초 트럼프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 협박하고 충격을 준다. 필요하면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와 척을 진 밥 코커 상원 외교관계위원장(공화당)은 감세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DACA를 철회한 것도 아니다. 유예가 끝나면 처음 결정대로 갈 방침이다. 과연 트럼프는 누구를 보고 정치를 하는 것일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월6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월6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집토끼’를 보고 정치하라(Play to the Base) 

연방대법원이 지난 4일 이슬람국가 등 8개국 주민들의 미국 입국금지(travel ban)를 규정한 반이민 행정명령의 효력을 인정한 것 역시 트럼프 방식의 성공이었다. 트럼프가 7개 이슬람국가 주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은 취임 1주일만인 지난 1월27일이었다. 연방 지법 판사들이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 원칙과 적법 절차에의 권리가 침해될 소지가 있다”면서 본국송환을 금지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리면서 벽에 부딪혔다. 트럼프 행동법칙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한번 내놓은 아젠다는 반드시 관철한다’는 것일 게다. 트럼프는 지난 9월 이라크를 제외한 차드·이란·리비아·소말리아·시리아·예멘 등 6개 이슬람국가와 북한, 베네수엘라 등 8개국 주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수정 행정명령을 다시 내놓았다. 연방항소법원은 이미 지난 11월, 입국 금지대상을 ‘미국에 조부모나 사촌 등을 포함한 가족 연고가 없을 경우’로 한정해 승인했고, 대법원이 이를 거듭 확인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분노와 좌절로 가득했다. 지난 6일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선언하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깃발과 작고한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진을 들고 나온 주민들이 가자시티 광장에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팔레스타인 지역은 분노와 좌절로 가득했다. 지난 6일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선언하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깃발과 작고한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진을 들고 나온 주민들이 가자시티 광장에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기성 제도는 물러서라, 트럼프가 간다 

트럼프가 이토록 집요하게 반이민 행정명령을 관철시킨 이유는 단 한가지다. 무슬림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보는 지지층(base voters·베이스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제도언론과 제도권 정치인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워 반대했지만, 트럼프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가 아니다. 지지층과의 약속이다. 왜? 2020년 대선에서도 승리, 8년 임기를 채우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지지층을 의식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새 대통령 취임 초기에 “선거유세 당시의 약속을 잊어버리라”는 주문이 나오는 것은 지지층만 보고 정치를 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해준다. 가급적 공약을 지키되 일단 당선됐으면 ‘집토끼’ 뿐 아니라 ‘산토끼’까지 아우르는 통합의 대통령이 돼야 하는 현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의 정치이지만, 트럼프의 정치는 아니라는 점이 반이민 행정명령 관철과정에서 거듭 입증됐다. ‘한번 들어온 돈은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신조는 사업가로서 가질만한 신조다. 트럼프는 그 신조를 ‘한번 찍어준 유권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로 변용해 정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제도권 정치·언론·권력이 계속 트럼프에게 지는 이유다. 지난 3월 출범한 트럼프 재선캠페인의 마이클 글래스너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은 늘 한가지 뿐”이라면서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공격하고 위해를 입히려는 사람들로부터 미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환영했다. 

미국 연방 상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안을 통과시킨 지난 12월4일 유타주 방문길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안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 연방 상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안을 통과시킨 지난 12월4일 유타주 방문길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안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예루살렘 수도 이전? 트럼프에겐 상식 

미국 연방 상·하원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그곳에 설치한다는 내용의 ‘예루살렘 대사관법’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한 것은 1995년이다. 역대 행정부는 그러나 중동평화협상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우려와 이슬람권 및 유럽의 반대를 감안해 이법의 시행을 6개월 마다 유예해왔다. 트럼프의 6일 예루살렘 수도 인정 선언은 기성 제도권 정치의 틀을 대외정치에서도 벗어난 대표적인 사례다.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를 계속 유예하면서 평화협상의 진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트럼프 지지층의 핵심인 백인 저교육층 노동계급은 이러한 동어반복적인 실패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트럼프는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조준했다. 지난해 대선유세에서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미국은 물론 세계가 설마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 ‘설마’는 반드시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파리기후협정 탈퇴와 마찬가지로 트럼프는 꼭 공약을 지키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월2일 뉴욕에서 열린 2020년 대선 선거자금 모금행사장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월2일 뉴욕에서 열린 2020년 대선 선거자금 모금행사장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나는 세계의 도전들을 열린 눈과 매우 신선한 생각으로 바라보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한 가정과 같은 가정을 하는 것으로, 실패한 전략을 반복하는 것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오래된 도전은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트럼프가 예루살렘 수도인정 선언을 하면서 한 연설의 첫 대목이다. 세계가 자주 목도하게 될 드라마의 첫 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트럼프를 욕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미 미국과 세계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그 현실에 적응하고, 그 현실에 올라타 우리의 아젠다를 관철시키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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