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에서 지난달 24일 시위군중들이 극우 파시즘 단체의 집회에 반대하는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반 이민 정서에 편승한 네오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팔레르모/EPA연합뉴스
■파워블로거에서 정치인으로, 코미디언의 변신
정치 풍자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69)의 인생을 흔든 것은 부패로 얼룩졌으면서도 엄숙하기 그지없는 이탈리아 정치문화였다. 1986년 라이1방송의 토요일 밤 토크쇼에서 베티노 크락시 당시 총리(사회당)를 풍자한 것이 화근이 돼 공영TV 출연이 금지됐다. 이후 20여년 동안 파워블로거로 거듭났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조성한 돈으로 라 레퓌블리카나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국내외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다.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이탈리아 중앙은행장의 사임을 촉구하거나, 전과자들의 국회의원직 박탈을 주장했다. 2007년엔 전국적으로 ‘엿먹이는 날(V-day)’ 행사를 조직해 부패와 탈세, 살인교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정치인 24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200만명이 거리로 뛰어나왔고, 인터넷 기반 정당의 모태가 됐다. 4일 이탈리아 총선을 계기로 포퓰리즘이 유럽통합을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이번 선거는 지난해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을 거치면서 한숨을 돌렸던 포퓰리즘이 올 한 해 유럽 정치에 던질 방향타이기도 하다. 그 핵심에 그릴로가 웹 전략가 지안로베르토 카사레지오와 함께 2009년 10월 창당한 오성(五星)운동이 있다.
■깨끗한 정치, 깨끗한 환경 주장하는 빅텐트(Big Tent) 정당
이탈리아 제1야당의 자리에 오른 오성운동은 반유럽통합·반이민·반기성제도를 주장하는 포퓰리즘 정당이다. 하지만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극우 또는 좌파 포퓰리즘과는 결이 다르다.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을 대변하는 마린 르펜의 민족전선(FN)의 자매정당은 오성운동이 아니다. 북부동맹(LN)이다. 정통 사회주의 가치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는 미국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나 장 뤼크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 앵수미즈)’와도 다르다. 공용 수자원·인터넷 접속권·지속가능한 개발·지속가능한 교통·환경주의 등 오성운동이 내세우는 5대 가치와 반유럽통합이란 면에서 진보정당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반이민 정서에서 갈라진다. 세계화와 유럽통합에 대한 저항을 넘어 경제성장 감퇴(degrowth)를 주장한다. 여러 가지 관점과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포괄(Big Tent) 정당으로 분류되는 연유다. 1990년대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의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에 환호했던 이탈리아다. 오성운동은 부패한 정치문화가 만들어낸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정치현상인지도 모른다.
오성운동은 2013년 총선에서 기성 정당에 실망한 민심을 얻었다. 상원 23.8%, 하원 25.5%를 득표했지만 다른 정당과의 비동맹 원칙에 따라 연정에 불참했다. 그 탓에 상원 315석 중 54석, 하원 630석 중 109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14년 유럽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21.15%를 득표했다. 로마 시장과 토리노 시장에 30대 여성 시장을 각각 배출하기도 했다. 이번 총선에는 기본소득 도입과 연금수령 연령 재조정, 재정적자 비중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한 유럽연합(EU) 재정협약 재협상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선거를 앞두고 유로존 탈퇴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이번 총선에선 정권창출을 꿈꾼다.
■승부처는 ‘분노의 남부(Angry South)’
포퓰리즘은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숙주로 한다. 지역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분노지수가 가장 높은 곳은 바로 경제적으로 뒤처진 남부지방이다. 실업률이 10.9%로 높은 이탈리아이지만 특히 남부의 젊은층 실업률은 50% 이상이다. 여전히 마피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여기에 지중해를 건너오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다. 분노한 남부의 민심에 가장 효율적으로 다가가는 정당은 오성운동과 극우 북부동맹이다. 불과 5년 전 연정을 구성했던 민주당은 프랑스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갈수록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전통적 지지기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유럽 중도좌파정당들의 공통된 운명이다.
풍자전문 코미디언 출신으로 오성운동을 창당한 베페 그릴로가 지난달 12일 나폴리 인근에서 열린 선거유세에 루이지 디 마리오 오성운동 정치대표와 함께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나폴리/로이터연합뉴스
1991년 부유한 북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면서 창당한 북부동맹은 마테오 살비니가 당권을 장악한 2013년 이후 민족주의 전국 정당으로 변신했다. 마린 르펜의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이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이번 총선 로고에는 아예 ‘북부’를 빼고 ‘동맹(lega)’만을 새겨넣었다. 2013년 총선 때만 해도 4%에 불과했던 지지율이 성공적인 전국 정당화로 15%에 육박했다. 민주당 정부가 최근 4년간 받아들인 난민 62만명에 대한 거부심리를 반영한다. 북부동맹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81)의 포르차(전진)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형제들이 구성한 우파연합은 이번 총선의 바로미터로 주목을 받았던 작년 11월 지방선거에서 남부 시칠리아를 중도좌파로부터 빼앗았다. 북부동맹은 역시 중도좌파의 아성이었던 중부 토스카니 지방에서도 2010년 이후 지지율을 6%에서 16%로 올렸다. 합리적인 중도우파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유럽통합에 찬성하는 포르차 이탈리아 역시 단호한 반이민 입장 덕에 주요 정당으로 부활했다.
■포퓰리즘이 득세하거나, 연정 구성을 못하거나
지난달 중순 마지막으로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 총선에서 가장 우세한 곳은 우파연합이다. 테르모멘토-폴리티코 조사 결과 37.5%의 지지율을 보였다. 민주당(21.3%) 주도 중도좌파 연합은 25.3%에 그쳐 단일정당으로 1위를 차지한 오성운동(26.3%)의 득표 예상률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파연합 안에서는 포르차 이탈리아 15.9%·북부동맹 14.8%·이탈리아의 형제들 5%였으며, 기타 우파가 1.8%였다. 하원 과반 의석은 316석이지만, 과도정부를 구성하려면 최소 40%의 의석을 차지해야 한다. 현재로선 우파연합이 가장 근접해 있다.
우파연합이 40%선을 넘기더라도 그 안에서 반유럽 성향의 북부동맹이 1위로 총리직을 가져간다면 EU에는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낡고 부패했지만 그나마 EU의 질서를 인정하는 포르차 이탈리아와 중도좌파 민주당 간의 대연정도 거론되지만 가능성이 낮다. 오성운동이 단독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반유럽·반이민을 기치로 북부동맹과 연합한다면 EU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밖에 없다. 총선이 끝난 지 6개월이 다 되도록 아직 연정 구성을 못한 독일처럼 장기간 표류하거나 재선거를 실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갈 길 바쁜 EU로서는 악재다. 이탈리아 총선이 치러지는 4일에는 독일 사민당(SPD)이 기민·기사당과의 연정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당원 투표를 실시해 EU로서는 두 개의 투표 결과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탈리아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에서 독일, 프랑스에 이어 경제 규모가 3위다. 하지만 국가부채가 2조3000억유로(3044조4000억원)로 지난해 GDP의 133%에 달한다. 유로존 전체 부채의 20%가 넘는다. 실업률(10.9%)과 빈곤위기 인구 비율(30%)은 각각 EU 평균(7.3%, 24%)보다 높다. 갈 길 바쁜 EU의 통합 행보를 더욱 무겁게 할 악재들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탈리아를 ‘유럽의 새로운 병자’로 지칭하면서 총선 결과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음을 사설로 밝혔다.
이탈리아 직접민주주의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을 만든 베페 그릴로(왼쪽)이 지난달 12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에서 열린 유세에 루이지오 디 마리오 정치대표(31)와 함께 참석하고 있다. 선거 유세는 마리오 정치대표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나폴리|AP연합뉴스
■욕하면서 배운다. 포퓰리즘의 시대에 적응해가는 유럽의 기성 정당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충격에 빠졌던 세계는 2017년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포퓰리즘의 기세가 수그러들 것으로 기대됐다. 특히 2015~2016년 100만명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기민당이 1위를 한 것에 고무됐다. 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대선 승리 및 이후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오히려 예외적 현상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일 총선에서 기민당과 사민당은 의석을 각각 수십석 잃었다. 반면에 극우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12.6%의 득표율로 사상 처음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메르켈-마크롱의 ‘MM라인’이 반이민·반유럽·반세계화의 포퓰리즘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낼 것이라는 기대 역시 희박해지고 있다. 욕하면서 닮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오히려 수권정당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이민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정부는 불법이민 규제를 대폭 강화한 이민법안을 지난달 발의했다. 총선에서 AfD로부터 일격을 당한 메르켈의 기민당 역시 작년 말 한 해 수용 난민의 한도를 20만명으로 제한했다. 오스트리아의 중도우파 국민당은 연정 파트너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자유당을 선택했고,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자유민주당)도 불법이민을 허용하지 않을 태세다.
2017년을 고비로 세계경제와 함께 유럽 경제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궤도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민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시선은 바뀌지 않고 있다. 2015년 난민 파동을 계기로 ‘경제적 부담’에서 ‘위협’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에 발표된 프랑스 퐁다폴의 조사 결과 EU 응답자의 58%는 이슬람(난민)을 ‘위협’으로 지목했다. 올 한 해 유럽 포퓰리즘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이탈리아 총선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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