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 섰던 슬로보단 프랄략이 지난 29일 판결을 거부하면서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시고 있다. 다 마신 뒤 그는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라고 말했다.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 벌인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EPA연합뉴스
"피고에게 20년형을 선고한다.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범죄를 저지른) 당신의 죄를 인정하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는 “Bullshit(헛소리)! 슬로보단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고 말했다.
증오가 전쟁을 부르고, 전쟁이 다시 증오를 심화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지난 11월29일 보스니아 전쟁 당시 반인도적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크로아티아계 군인·정치인 6명에게 최종 선고공판이 있었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ICTY). 백발의 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장군 슬로보단 프랄략(72)은 이 말 끝에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그만하라(stop please)”는 판사의 말을 무시한 그는 “나는 방금 독약을 마셨다”고 외쳤다. 재판은 중단됐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전세계로 생중계된 장면이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그 죽음의 함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랄략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희곡작가이자 영화 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프랄략의 외침이 연극대사 같았다고 보는 이유다. 지금쯤 보스니아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그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탓이었다. 프란요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끈 크로아티아민주동맹의 창당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방위협의회(HVO·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았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협력관계였다. 유고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 공화국군이 포위했던 보스니아 남부의 고도(古都) 모스타르를 지켜냈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 1993년 초 벌어진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한 것은 프랄략의 군대였다.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 ‘대 크로아티아’를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는 모스타르 안팎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내쫓았다. 수만명이 추방됐고, 1만여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됐다. 피해자에는 세르비아계와 집시도 포함됐다. 지난 주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군 사령관 이 “모두가 거짓말”이라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처럼 프랄략도 판결을 거부했다.
이날 10~25년형을 받은 6명의 전범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다. 세르비아계에 비해 규모는 적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전쟁범죄·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인정을 한 것이 이날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 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사회의 통념을 깨고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묶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도 양심수이자 ‘확신범’이다. 믈라디치가 판결 뒤 “나는 늙은 사람이다.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사람(동족)들에게 남길 유산이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랄략의 절규는 자신의 무죄 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군인은 AFP통신에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고 말했다. 작고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는 AP통신에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ICTY는 명예롭지 못한 끝을 보게 됐다. 이날 선고는 1993년 설립된 ICTY가 올해 말 문을 닫기 전에 연 마지막 공판이었다. 희대의 자살극으로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됐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한 통렬한 부정인 동시에 죽음으로 ‘대의’를 지키려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대의’는 대의가 아니다. 보스니아 전쟁 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 민족주의 가 더욱 견고해졌다. 바로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다. 네덜란드 경찰은 재판정을 ‘범죄현장’으로 지정하고 프랄략이 독극물을 반입한 경위를 수사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까. 무슬림·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가 연방을 이루는 방식으로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항구적일까. 22년전 총성이 멎은 보스니아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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