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브 카진스키 폴란드 집권 법과 정의당(PiS) 대표(왼쪽)이 지난 6일 스몰렌스크 참사 추모시설의 준공식이 열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행사장에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스몰렌스크 참사는 2010년 4월 카진스키 대표의 쌍둥이 형이자 당시 폴란드 대통령이었던 레흐 카진스키 부부를 비롯한 폴란드 각계 지도층 인사 등 96명이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사건이다. 부다페스트/AP연합뉴스
■과거엔 유럽이 우리의 미래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유럽의 미래?
빅토르 오르반 총리(54)의 집권여당 ‘피데스’가 압승을 거둔 헝가리 총선을 이틀 앞둔 지난 6일. 부다페스트 남부의 다뉴브강가에는 다소 엉뚱한 추념시설이 들어섰다. 2010년 4월 러시아 스몰렌스크에서 추락한 폴란드 공군기 Tu-154기 탑승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시설이다. 레흐 카진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를 포함해 장관들과 육·해·공·특수부대 지휘관, 가톨릭주교, 중앙은행장, 국회의원 등 96명이 전원 사망한 참극이었다. 하지만 100% 폴란드인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시설이 왜 헝가리 수도에 들어설까.
폴란드의 국가적 불행을 부다페스트에서 추념한 것은 중·동부유럽 포퓰리즘을 이끌고 있는 오르반 총리와 야로슬라브 카진스키 폴란드 집권 법과 정의당(PiS) 대표 간의 특수관계 때문이다. 카진스키 대표는 이날 “스몰렌스크 추념시설은 우리의 우정을 강화하는 아름다운 제스처”라며 사의를 표했다. 곧이어 생뚱맞게 이웃나라 총선 지원에 나섰다. “폴란드나 헝가리에서 자유와 주권, 민족적 존엄은 빅토르 오르반이라는 이름과 연결돼 있다”면서 총선에서 오르반과 피데스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오르반과 카진스키는 EU가 내정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함께 제기해온 사이다. EU는 최근 폴란드의 사법제도 개악을 빌미로 EU 내 폴란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리스본조약 7조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헝가리 역시 이민정책과 민주주의 퇴행, EU 기금 전용 등의 혐의로 EU의 견제를 받고 있다. 오르반은 “중부유럽을 민족적, 기독교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헝가리와 폴란드 두나라에 달렸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27년 전 유럽은 우리의 미래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유럽의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지난 6일 부다페스트 남쪽의 다뉴브강가에서 열린 스몰렌스크 참사 추모시설 준공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헝가리 총선을 이틀 앞두고 바쁜 와중에도 강행한 이날 행사는 중부유럽에서 오르반 총리의 리더십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부다페스트/EPA연합뉴스
■총선 뒤 언론과 시민사회에 재갈 물리는 오르반 정부
오르반의 피데스(Fidesz)와 연합정당 기독민주국민당(KDNP)은 지난 8일 총선에서 48%를 상회하는 득표율로 전체 199석 중 3분의2가 넘는 133석을 차지했다. 2010년, 2014년에 이어 세번째로 개헌선을 넘는 압승이다. 절반이 안되는 득표율로 개헌선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오르반 정부가 2012년 개정한 선거법 덕분이다. 선거유세는 오르반이 퍼뜨린 공포와 증오의 바이러스가 판을 갈랐다. 반 이민, 반 무슬림, 반 서방이 주제였다. 헝가리 유대인 출신의 미국인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국가의 적’으로 지목됐다. 헝가리를 이민자들로 뒤덮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매도했다. 유세 기간 동안 국영TV는 중동과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몰려들었던 2015년 이후 불법이민과 관련한 끔찍한 (범죄)장면들을 되풀이 방영했다.
최고법원 판사의 40%가량을 곧 해임하는 것을 골자로 한 폴란드의 사법 개악은 기실 오르반이 1998~2002년, 2010~2018년의 12년 동안 해왔던 것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중부유럽의 스트롱맨 오르반은 시민권을 제약하고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권위를 약화시켜왔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당시에는 헝가리-세르비아 국경지역에 철책을 세워 불법이민자들의 유입을 차단했다. 총선 뒤 헝가리 민주주의는 우려대로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총선을 이틀 앞둔 지난 6일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헝가리 국기가 나부끼는 다페스트 인근의 한 유세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부다페스트/AP연합뉴스
당장 80년 역사의 최대 야당지 마자르 넴제트가 지난 11일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다. 한때 오르반의 동지였다가 갈라선 라조스 시믹스카가 발행인이다. 온라인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도 문을 닫았다. 마자르 넴제트는 정부광고를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2010년 오르반의 2기 집권 이후 친정부 기업들이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사들여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고, 반 정부 성향의 매체에는 정부광고와 민간투자를 억제됐다. 오르반은 또 난민 관련 비정부기구(NGO)들로 하여금 내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한편, 외국의 기부금에 25%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할 작정이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법부에 대한 통제 역시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독립언론 기자들은 ‘저널리스트 체임버’로 몰아넣어 더욱 재갈을 물릴 방침이다. 카진스키가 오르반에게 “우리는 당신이 보여준 솔선수범에서 배운다”며 찬사를 보내는 까닭이다.
총선 압승에는 또다른 비결이 있었다. 투표일 몇주전부터 헝가리 가정마다 총리의 편지를 보내 가스비를 한번에 한해 38유로(약 5만원) 깎아준다는 희소식을 꽂았다. 200만명을 웃도는 연금생활자들에게는 32유로 상당의 상품권을 전달했다. 오르반 정부는 자녀를 많이 갖거나 집을 살 경우 금전적 인센티브를 주는 가족정책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PiS 역시 연금 개시연령을 낮추고, 자녀 혜택과 최저임금을 높이는 방식으로 금전적 혜택을 뿌리고 있다.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3만달러를 웃도는 두 나라에서 어떻게 속이 빤한 선심공세가 먹힐까. 그에 대한 답은 시장경제 이행기에 깊이 각인된 좌절 때문인 것 같다. 코르비니우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피터 보드 전 헝가리 중앙은행장은 특히 이행기에 박탈감이 강했던 중하류층 서민들 중에는 아버지 같은 정치인과 어머니 같은 안전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폴리티코에 전했다. 오르반 피데스 정부가 바로 그 두가지를 제공하고 있다. 선심정치와 권위주의 지도자, 갈수록 경직되는 사회 분위기를 조합하면 시민적 자유를 다소 제약받지만 약간의 번영과 안정을 구가했던 소비에트 블록 시절의 ‘좋았던 옛날’이 복원된다. 폴리티코가 헝가리, 폴란드 특집에서 ‘신 공산주의자들’이라는 헤드라인을 단 연유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집권여당이 압승을 거둔 헝가리 총선 하루 뒤인 지난 11일 부다페스트 시내의 한 카페에서 한 주민이 마자르 넴제트의 마지막 신문을 읽고 있다. 80년 역사의 최대 야당지인 이 신문은 이날 폐간을 발표했다. 부다페스트/로이터연합뉴스
■서유럽 포퓰리즘과 다른 점
1990년대 만해도 체코·헝가리·폴란드·슬로바키아 등 중부유럽 국가들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우등생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과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같은 인물이 건재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생활수준은 곧바로 서구수준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되레 자본의 논리 탓에 종래의 삶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시장경제 이행기의 좌절에 소금을 뿌렸다. 부채에 몰린 각국 정부는 긴축재정에 돌입하면서 복지를 대폭 줄였다. 빈 곳간은 증오를 만들어낸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고개를 들고 그에 착종한 포퓰리즘이 싹을 틔운 것이다. 오르반 같은 정치인들이 리버럴 성향에서 권위주의 성향으로 전향한 배경이기도 했다. 발빠른 변신이었고, 선거에서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 공개연설에서 소련군의 철군을 촉구하며 사자후를 토했던 청년 오르반은 이제 서구의 가치를 비난하는 ‘푸틴주의자’(요시카 피셔 전 독일 외교장관)가 됐다. 2016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가장 먼저 인정했다. 오르반은 ‘비 자유주의적(illiberal) 민주주의’라는 궤변을 내놓은 바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시민권을 존중한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민족적 자족과 주권을 보호하고 민족 공동체를 구축해야할 국가는 리버럴할 수 없다. 해서 비리버럴이다. 오르반은 비리버럴 모범국가로 터키와 싱가포르, 러시아, 중국을 지목했다.
세계화와 유럽통합이 낳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숙주로 한다는 점에서 중·동부 유럽 포퓰리즘은 서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무슬림 이민자와 유대인 등 외부의 적이 국가의 기독교 정체성을 흐린다는 위기의식도 닮은 꼴이다. 하지만 여기에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과 시장경제 이행의 쓰라린 경험이 더해졌다.
헝가리 총선을 이틀 앞둔 지난 6일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부다페스트 인근의 한 유세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부다페스트/EPA연합뉴스
■서구 가치의 위기, 차이나 머니 변수
서구 포퓰리즘과 또다른 차이는 헝가리와 폴란드 정부가 받고 있는 외부의 재정지원이 대부분 EU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두나라가 계속 경제성장을 하는 것도 아이로니컬하게도 포퓰리스트들이 기회만 있으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 비난하고 있는 공공의 적, EU 덕분이다. 오르반과 카진스키에게 서구는 가상의 적이자, 현실의 돈줄이다. 2014~2020년 EU가 폴란드에 지원하는 지역개발·사회·농업펀드 등 각종 기금 만 860억유로에 달한다. 오르반은 지난 2월 국정연설에서 “EU와 독일, 프랑스 정치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헝가리는 외국 강대국들의 명령대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유권자들에게 EU의 내정간섭과 국제금융의 위험을 끊임없이 경고하면서, 한편으로 EU의 자금에 의존하는 위태로운 두줄타기를 하는 것이 중·동유럽 포퓰리즘의 현주소인 것이다.
일대일로를 표방한 차이나 머니는 또다른 변수가 되고 있다. 중·동부유럽 국가들과 EU 지도부 간의 틈새를 더욱 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지난해 11월28일 부다페스트에서 중·동유럽 16개국 정상들과 ‘16+1정상회의’를 갖고 중국의 투자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일단 30억달러 투자가 확정됐지만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2012년 이후 150억달러를 이 지역에 투자하고 있다. 주최국 수반이던 오르반은 “유럽 자본만으론 부족하다. 중국이 중·동부유럽의 발전과 개발에 관심을 갖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헝가리 총선을 이틀 앞둔 지난 6일 부다페스트 서남쪽 스젝스케스페르헤르바르에서 열린 유세장에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지지자들이 집권 여당 피데스의 푯발과 헝가리 국기를 흔들고 있다. 부다페스트/EPA연합뉴스
헝가리와 폴란드가 서구의 가치를 계속 저버린다면 EU는 재정지원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들 정부의 일탈을 통제할 수있다. 이론적으로 그렇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EU 신규 회원국들은 1993년 ‘코펜하겐 기준’에 따라 △민주적 가버넌스와 △인권 △법의 지배 존중 등의 의무가 있다. 이를 어길 경우 각종 EU 기금의 지원을 중단하거나 EU 내 의결권을 박탈할 수 있다. 하지만 두가지 모두 만장일치제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녹록지 않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가입(WTO) 가입을 계기로 중국의 열린 시장과 자유주의 세계질서 편입을 기대했던 미국과 EU는 호된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 헝가리와 폴란드 같은 포퓰리즘 정부의 득세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유럽 질서는 더 혼란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서유럽 각국 역시 자국 내 포퓰리즘 정당의 발흥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작금에 구미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포퓰리즘 현상은 세계화 이후 세계질서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경고음을 잇달아 내고 있다.
유난히 민족주의가 강조돼서인지 헝가리 총선이 진행된 지난 8일 베레세기하즈의 한 투표구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투표하고 있는 여자들의 뒷모습이 주목을 끌었다. 베레세기하즈/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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