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캠페인 선거자금 모금행사가 예정된 캘리포니아주 베버리힐스의 한 공동주택 입구에서 반 트럼프 성향의 주민들이 그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 앞서 대형 트럼프 풍선에 바람을 넣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내 번영을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해외 이익을 보호할 수 없다.”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 인용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어록이다. 지난 8일(현지시간)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와 10%의 관세폭탄을 매긴 조치에 대한 발표자료 맨 앞에 인용해놓았다.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미국의 번영과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작년 말 기업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내리고, 1조5000억달러의 인프라 투자계획으로 굵직한 국내 경제 현안을 매듭지은 트럼프 대통령이 갈수록 공격적인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수입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는 지난 1월 수입 세탁기와 태양광전지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에 이은 조치다. 트럼프의 주 전선은 자유무역협정(FTA)과 중국 견제다. 미국은 멕시코·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한국과 한·미 FTA를 재협상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중국의 기술 이전 강요 및 불공정 라이선스 관행, 지식재산권 침해 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펜타곤도 갸우뚱한 국가안보 위협론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폭탄을 부과하면서 동원한 근거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수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무역확장법 232조이다. 1962년에 제정됐다.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행정부가 이 법에 따라 각각 한 차례씩 원유 수입을 제한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생긴 이후에는 트럼프 이전까지 한 차례도 적용된 적이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 12일 사설을 통해 미국 국방부도 사실상 거부한 안보위협론이라고 지적한 까닭이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상무부를 위해 작성한 메모는 백악관의 입장과 국방부의 입장을 교묘하게 섞어 놓았다. 백악관 방침대로 “불공정 무역관행에 기초한 철강·알루미늄 수입은 국가안보를 해친다”고 적었다. 하지만 미국 국방에 필요한 철강과 알루미늄은 각각 미국 내 생산량의 3%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불공정 무역관행이) 국방부가 국방에 필요한 철강·알루미늄을 획득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또 상무부의 철강업계 가동률 산정, 국방과 무관한 길쭉한 형태의 철강·알루미늄 제품까지 포함시킨 데다 전기용광로를 이용하는 소규모 제철소의 생산능력을 감안하지 않는 등 무역확장법 232조를 동원했지만 주장의 근거 자체가 취약하거나 없다는 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트럼프의 관세폭탄은 철강·알루미늄을 사용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업계의 집단 반발을 사고 있다. 완성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상무부의 주장이 ‘불법적 책략’이라면서 송사를 벌여볼 만하다는 권유까지 내놓았다.
■한국과 독일 등 동맹국에 더 큰 타격
관세와 무역정책은 그 의미가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적·외교적 변수로도 작용한다. 각국 언론이 관세폭탄의 파급효과를 분석하면서 이코노미스트들뿐 아니라 국제정치 전문가들의 논평도 참고하는 이유이다. 어차피 정치와 경제는 함께 간다. 매티스 장관은 메모에서 “상무부 보고서의 옵션들이 우리의 핵심 동맹국들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중국을 겨냥한 것임에도 결과적으로 동맹국들에 더 타격을 입히게 된 것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가상 적국은 중국이다. 취임 전부터 중국의 무역관행을 비난해왔다. 하지만 정작 이번 조치는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 독일, 대만 등 미국의 동맹 또는 우방국들을 상대로 하고 있다. 돈 앞에 피아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NAFTA 재협상이 걸려 있어 일단 제외했지만, 언제 편입할지 모른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1980년대 이후 최악의 무역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까닭이다.
트럼프가 진지하게 무역전쟁을 시작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소모전에 그칠 것인지는 그의 다음 행보를 보아야 분명해진다. 어떤 나라가 최대 피해를 보고 어떤 나라가 면제받는지에 따라 공격의 의도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백악관이 당초의 전면적인 관세 부과 방침에서 한발이라도 물러난 것은 법인세 인하에 환호했던 미국 재계마저 반대하고 나선 상황에서 취해진 조치다. 하지만 “무역전쟁은 좋고 이기기 쉽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리는 트럼프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튈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하는 포고령에 서명하기에 앞서 연설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의 불공정 무역관행이 미국인의 일자리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협에 빠드렸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뒤쪽으로 말을 탄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흐릿하게 보인다. 워싱턴/AP연합뉴스
■파국으로 끝난 역사적 경험
관세폭탄을 동원해 미국 경제를 살리려던 과거의 노력은 파국으로 끝나거나 무위로 돌아갔다. 교역이 줄어들면서 노동자들은 되레 일자리를 잃었고, 동맹국들과의 관계까지 나빠지면서 국제정세마저 불안해졌다. 역사적인 경험은 1930년의 스무트-홀리법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각국 이코노미스트들의 지적이다. 스무트-홀리법은 미국 농장과 공장을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도입했다. 대공황을 돌파하기 위해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보호주의로 흘렀기 때문이다. 법 통과에 따라 설탕에서 신발, 철강에 이르기까지 수백 가지 제품의 관세를 올렸다. 미국의 무역상대국들 역시 관세를 인상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교역은 줄어들고 불황은 심화됐다. 2년 뒤 백악관과 의회를 모두 장악한 민주당은 관세를 대폭 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높은 관세를 유지했고 각국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깊어지면서 세계는 2차 대전으로 치달았다.
1980년대 초 일본 자동차가 몰려오자 미국 자동차 업계는 연료 효율을 높이거나 소형차를 만드는 대신 관세 인상을 요구하는 로비를 했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내에 공장을 짓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미국은 또 1985년 플라자합의를 맺어 달러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한편,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무역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당시와 달리 현재 미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은 일본이 아닌, 중국이다. 미국에 안보를 맡기고 번영을 구가했던 일본과 달리 중국이 미국의 요구에 호락호락할 가능성은 적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역시 2002년 철강 관세를 올렸지만, 철강 업계보다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수입 철강을 사용하는 업계의 규모가 더 컸기 때문에 피해는 미국 경제에 떨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행정부의 철강 관세 인상 탓에 2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전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국 업계가 WTO에 제소하고 다른 미국 상품에 보복관세를 매기자 조치를 철회했다. 이번에도 흐름은 비슷하다 유럽연합(EU)과 중국은 WTO 제소와 보복관세를 경고하고 있다. EU는 쌀과 땅콩버터, 버번 위스키는 물론 미국산 오토바이에 보복관세를 매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가 부시처럼 후퇴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하는 포고령에 서명하기에 앞서 연설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의 불공정 무역관행이 미국인의 일자리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협에 빠트렸다고 주장했다. 사진 왼쪽은 백악관이 초청한 철강 및 알루미늄 업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다. 워싱턴|AP연합뉴스
■존재론적 위기에 처한 WTO
트럼프의 관세폭탄으로 가장 큰 딜레마에 처한 것은 세계 무역의 사령탑인 WTO이다. WTO의 존재 이유는 관세를 낮추고, 무역장벽을 제거함으로써 교역국가들이 모두 혜택을 받는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 있다. 세계 최고 부국이자, 바로 그 국제적인 공감대를 주도해온 미국이 게임의 룰을 깨고 나섬에 따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WTO가 ‘존재론적 위기’를 맞았다고 적었고,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는 트럼프의 철강·알루미늄 관세가 공식 발표된 지난 8일을 ‘WTO가 사망한 날’이라고 선언했다. 2001년 가입한 중국이 무역규범을 무시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던 WTO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진단이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은 철강·알루미늄 관세폭탄 방침이 알려진 지난 5일 미국을 특정하지 않은 채 전 세계적으로 무역장벽이 높아지는 실제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제베두 총장은 “우리가 일단 이 길로 접어든다면 방향을 되돌리기가 매우 힘들다”면서 “‘눈에는 눈’ 식의 조치는 우리 모두를 맹목적으로 만들어 세계(경제)를 심각한 불황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원의 애덤 포슨 회장은 뉴욕타임스에 “대통령과 보좌진은 미국이 스스로 만든 글로벌 시스템에 의해 망쳐지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패배자와 자유무역의 희생자들에게 일자리를 되돌려주겠다는 포퓰리즘으로 백악관 입주권을 잡았다. 취임 직후부터 재선 운동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백인 빈곤층으로 대표되는 지지기반(Base)을 바라보고 하는 트럼프의 정치는 계속된다. 그 주적은 중국이나 ‘부수적 피해’는 갈수록 확산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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