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2일 500억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율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직후 백악관 아이젠하워행동에서 열린 차세대 지도자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확전 양상이다. 선공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시작했지만, 결과는 속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달 초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폭탄이 전방위적이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주를 고비로 과녁을 중국으로 좁힌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난해 3750억달러를 기록한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무역전쟁의 또 다른 전선이다. 유럽 각국 역시 중국의 기술 및 지재권 도용에 대한 경계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해묵은 과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양상이다.
■ USTR, 중국 지재권 도용에 보복 착수
트럼프 행정부는 최소 500억달러(약 54조원)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고 투자 제한 조치가 담긴 패키지를 22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실제로는 600억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이 부과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21일 연방 하원 세입위원회에 출석해 밝힌 대중 조치의 목적은 미국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직전 “끔찍한 지식재산권 도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협의회 국장은 “중국의 경제적 침략으로부터 미국을 전략적으로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복 규모 최소 500억달러는 지난해 8월 중국의 불공정 거래관행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USTR이 산출한 금액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한 해 동안 미국의 기술 또는 지재권을 침해한 중국 제품의 규모를 산출한 결과 대략 300억달러가 나왔다고 라이트하이저는 밝혔다. 미국은 특히 미국 기업들에 대해 합작투자의 형태로 선진기술의 이전을 압박하는 중국의 관행을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당장 중국 측에 관세를 부과하기보다는 미국 업계의 의견을 들어 응징할 중국 제품을 확정할 계획이다. USTR은 같은 맥락에서 중국 측의 투자를 제한하는 조치도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앞서 지난 12일 싱가포르 반도체 업체 브로드컴의 미국 퀄컴 인수를 역시 ‘국가안보 위협’을 이유로 저지했다. 중국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는 인수·합병은 원천봉쇄한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중국의 기술 및 지재권 침탈에 대한 미국의 보복조치는 향후 몇 달 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해졌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베이징의 전국인민대회당에서 끝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중국은 ‘메이드 인 차이나(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에 따라 2015년부터 외국의 첨단기술 보유 업체에 대한 인수·합병 또는 합작 공세를 확대하고 있다. 주로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대상이다. 기술 또는 지재권 침탈을 토대로 제조된 중국 제품에 대한 징벌성 관세 부과와 중국의 투자 제한은 이에 대한 방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가 3750억달러라지만 실제론 5040억달러”라면서 “이를 25% 수준인 1000억달러까지로 줄이겠다”고 다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8일 역시 국가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발표한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각각 25%, 10%의 고율 관세 부과 조치에는 국가별로 희비가 갈리고 있다. USTR은 23일 관세조치 발효를 앞두고 한국과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유럽연합(EU) 등을 잠정 제외했지만 중국은 포함시켰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은 이날 “철강 관련 조치의 상당수는 중국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 지재권 견제하며 투자 기대하는 유럽
국가안보 위협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의 기술 침탈에 경계를 강화하는 것은 ‘트럼프의 미국’만이 아니다. 유럽 각국 역시 전략산업과 민감한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중국의 투자와 중국과의 교역이 가져오는 이득 간에 균형을 잡는 데 골몰하고 있다. 유럽외교관계협회(ECFR)는 지난해 말 연례 중국보고서에서 자칫 지식재산권 유출로 이어지기 십상인 중국의 투자에 대해 국가별로 대응하는 대신 EU 차원에서 공동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2016년 독일의 대표적인 로봇 제작업체 쿠카이가 중국 업체에 넘어간 뒤 부쩍 경계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이 경제난을 겪고 있는 남유럽과 중부유럽의 철도와 항만 등 전략적인 사회기간시설에 투자하는 것 역시 주시하고 있다. 브루너 르 매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지난 1월 방중 길에 중국의 투자를 환영하지만, 프랑스 자산의 안전 여부를 검토한 뒤 허용할 것이라고 말해 고민의 일단을 드러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작년 9월 미국의 Cfius와 비슷한 유럽 차원의 통제 시스템을 만들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해 외국 기업의 지분이 25%를 넘을 경우 국가안보 차원에서 검토토록 의무화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견제는 중국 측의 반발을 야기해 차이나 머니의 투자로부터 멀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중국의 부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각국의 입장은 엇갈린다. 그리스와 헝가리 등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중국 자본의 도움을 받은 나라들은 중국의 추가 투자를 억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강한 제재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EU 차원에서 중국 자본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독일이 중국 자본 견제에 보다 적극성을 보이는 까닭은 대표적인 자동차 업체인 다임러에 중국 자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중국 자동차 업체 지리(吉利)의 리슈푸 회장은 최근 암암리에 90억달러 상당의 주식을 매입, 다임러의 최대주주가 됐다. 발표 뒤에나 밝혀진 사실이다. 독일 당국은 뒤늦게 투자의 합법성을 검토하고 있지만, 사후 제동을 걸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에만 중국이 300억달러를 투자한 호주는 대표적으로 차이나 머니의 양면성에 딜레마를 겪고 있다. 2015년부터 1500만달러 규모 이상의 외국인 농장 매입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감독하고 있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중국의 호주 전력업체 투자를 금지하기도 했다. 캐나다 역시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 컴퓨터 업체 레노보의 블랙베리 인수에 제동을 걸었다.
■ 중국은 무역전쟁을 피하자고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은 트럼프의 생각일지라도 일부는 맞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교역은 정말 문제가 있다.” 트럼프의 정책에 대해 좀체 지지를 하지 않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최근 인정한 사실이다. 서방 국가들이 차이나 머니에 대한 경계를 높인 것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누적돼온 문제들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의 대중국 문제의식은 뿌리가 깊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열린 시장에 노동집약적인 저기술 상품을 내다 팔아 자본을 형성했지만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 기반은 그만큼 약해졌다.
프리드먼이 인용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토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제조업은 40% 정도가 타격을 받았다. 오하이오·미시간·펜실베이니아·위스콘신주에서 100만개의 공장 일자리가 사라졌다. 바로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모두 승리한 주들이다. 이들 주의 지지층들을 겨냥한 트럼프의 정치가 대중국 강경조치를 내놓은 셈이다. 여기에 중국의 투자 및 거래 관행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관세가 대표적이다. 자동차의 경우 미국의 관세는 2.5%이지만, 중국은 수입차에 25%의 관세를 매긴다. 자동차부품도 마찬가지다. 애플과 같은 미국 기업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서비스 데이터를 담은 서버를 중국 내에 둬야 하지만 미국에 진출한 중국 기업은 그럴 필요가 없다. 중국 진출 미국 기업들에 대해 중국 정부는 합작을 통한 기술 이전을 강요한다. 테슬라의 창업주 일론 머스크는 “미국 기업들은 중국 내 자사 공장조차 50% 이상 지분을 가질 수 없지만, 미국에는 중국 기업들이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전기차 업체가 5개나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바 있다.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 기반을 흔들면서 성장한 중국은 이제 첨단기술 대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계속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휘둘리다보면 영원히 회복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미국과 유럽에 팽배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트럼프라도 몇가지 이례적인 조치로 21세기 이후 쌓인 중국과의 교역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먼을 비롯한 제도권 언론과 학계 역시 중국의 무역 및 거래 관행에 대한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무역전쟁을 야기하기 십상인 트럼프식의 보복조치에는 반대하고 있다. 대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라는 국제 제도를 통해 관세를 철폐하는 한편, 미국 스타일의 교역관행을 국제질서로 만들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취임 첫날 무효화한 것이 바로 TPP였다.
중국은 23일 호두와 포도주, 돼지고기 등 약 30억달러 상당의 미국산 수입품에 15~25%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지난 20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에서 “중·미 양국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길 바란다”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무역전쟁을 피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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