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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

이란핵합의 파기로 또 좌절, 트럼프의 '신발털개'로 전락한 유럽

by gino's 2018. 5. 26.

지난 18일 이란 테헤란에서 금요 기도회가 끝난 뒤 열린 반미 시위 참가자들이 이스라엘과 미국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날 시위는 미국이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뒤 이스라엘 당국의 발포로 수십명이 사망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열렸다. 테헤란 | AP연합뉴스
 

영국의 글로벌 에너지기업 BP는 이란 국영석유회사 NIOC와 합작해 북해에서 천연가스를 생산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걸프 해역의 이란 사우스 파르스 가스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프랑스 토탈은 11월 초까지 사업에서 손을 뗄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 8일 이란 핵합의를 파기한 뒤 유럽 기업들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토탈이 지난해 7월 이란과 48억달러 규모의 가스전 개발 계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가 풀린 뒤 서방 에너지기업의 첫 이란 진출로 주목을 받았던 사업이었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의 망토 안에 놓여 있음이 새삼 입증되고 있다. 

시험대에 오른 것은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아니라 세계였다. 특히 2차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의 동업자였던 유럽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란 핵합의 파기 발표는 미국의 리더십을 흔드는 수준을 넘어 서구사회 전체의 리더십을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진단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해 트럼프의 기후변화 파리협정 탈퇴가 서구의 컨센서스를 깬 것이었다면, 이란 핵합의 파기는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에 금을 낸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유럽은 (더 이상) 트럼프의 신발 털개(doormat)가 될 필요가 없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등장하면서 유럽 차원의 단호한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라고 불리는 이란 핵합의는 국제사회가 특정국가의 핵개발을 합의에 의해 중단시킨 모범사례로 꼽혔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공식 핵보유 5개국(P5)과 독일이 참여했다. 특히 이란과 외교관계가 없는 미국을 대신해 협상에 나섰던 유럽 국가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2002년 8월 이란 내 비밀 우라늄농축시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시작된 이란 핵위기는 2013년 11월 잠정합의안을 도출하는 데만 11년이 걸렸다. 이후 2015년 7월 합의안 조인까지 1년8개월 동안 협상이 벌어졌다. 국제에너지기구(IAEA)가 이란의 합의안 이행에 합격점을 주면서 2016년 1월 국제사회의 제재가 풀렸다.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에 처했지만, 트럼프의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되레 승전국인 양 이란의 백기투항을 요구하고 있다.

작년 기후변화 협정 탈퇴 이후 이란 핵합의 파기 등 일방주의

‘이란과 사업 추진’ 영·프랑스 기업들, 미 엄포에 서둘러 철회

EU 의장 “적보다 못한 친구”…유럽 국가들 공동의교 움직임

트럼프 ‘EU를 미국과 경쟁’ 인식…동맹 균열 이어질 지 주목

중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3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식에 리커창 중국 총리와 함께 참가하고 있다. 이란 핵합의 문제는 이번 방중의 핵심의제 중 한가지다. 같은 날 미국을 방문한 헤이코 매스 독일 외교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 뒤 이란 핵문제와 관련, “타협까지는 머나먼 길이 놓여 있다. 우리(독일과 미국)는 완전하게 다른 두개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21일 헤리티지재단 연설에서 밝힌 12개 요구사항은 이란에 이슬람 혁명정부를 끝내고 미국의 위성국으로 남으라는 주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핵프로그램의 항구적이고 검증가능한 포기, 우라늄 농축 및 플루토늄 재처리 중단, IAEA의 모든 핵관련 시설 사찰은 핵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이라도 있다. 하지만 탄도미사일 확산 종결 및 핵무기 탑재 미사일 개발 중단 등은 국제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요구다. 유죄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억류 미국인과 동맹국 시민을 석방하라는 요구도 곁들였다. 여기에 예멘 후티반군과 헤즈볼라 등 시아파 무장조직과 아프가니스탄 테러리스트 지원 중단, 시리아 주둔군 철수, 이스라엘 파괴 위협 중단 등 12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활동을 용인하면서 이란의 활동에는 족쇄를 채우겠다는 말이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세계는 이제 미국이 세계를 대신해 결정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면서 12개 항목 중 단 한가지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23일 라마단 행사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탈퇴 선언 이후에도 핵합의를 준수하겠다고 밝힌 영국, 프랑스, 독일에 이란산 원유의 지속적인 수입 및 탄도 미사일과 역내활동에 대한 간섭 중단 등을 요구했다. 테헤란/EPA연합뉴스

미국-유럽 관계에서 불행은 홀로 오지 않았다. 지난해 기후변화 파리협정을 탈퇴하면서 생각하지 못하던 일을 생각하기 시작한 유럽은 올해 들어 연타를 맞고 있다. 미국의 이란 핵합의 파기는 물론 유럽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폭탄, 주이스라엘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에 따른 가자지구 유혈사태 등 트럼프의 결정들은 사사건건 반유럽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오죽하면 “적보다 못한 친구(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라는 말까지 내놓겠는가. 그러나 트럼프의 그 어떤 결정보다 이란 핵합의 탈퇴가 유럽에 주는 충격은 크다. 이란 핵협상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2003년)과 이후 혼란기간 동안 진행됐다. 미국 일방주의 외교의 반대편에서 타협과 합의의 질서를 부여한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더구나 미국과 달리 유럽은 중동과 가깝다. 시리아 내전 이후 난민 유입 탓에 포퓰리즘의 홍역을 앓고 있다. 이란이 핵활동을 재개할 경우 중동의 화약고는 또다시 어디에서건 폭발음을 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유럽은 미국의 전횡에 맞서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준비가 돼 있는가. 돼 있다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 제임스 트라우브 국제협력센터(CIC) 연구원은 우선 대서양동맹의 파기를 제안했다. 그는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동맹이 탈냉전 이후에도 살아남은 것은 가치의 수렴 덕분이라기보다는 전략적 필요 때문이었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트럼프는 유럽에 존재론적인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힘으로 유지됐던 질서에서 유럽은 과연 친숙한 과거와 작별할 수 있을까.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에서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영국·프랑스·독일 지도자들은 일단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트럼프의 이란 핵합의 발표 수시간 만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이란 핵합의가 유엔 안보리에서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음을 환기시키면서 계속 지킬 것을 다짐했다. 물론 정치적 선언과 경제적 현실은 다르다. BP나 토탈 등 기업들은 이란의 에너지 분야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시작되는 11월4일을 반년이나 남기고 벌써부터 발을 빼고 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 일고 있는 흐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10일 샤를마뉴상 수상 연설에서 “유럽은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맞아야 한다. 한 나라(미국)가 약속을 어겼다고 우리의 진로를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취임 이후 유럽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메르켈 총리가 준 상이다. 마크롱이 제시한 ‘새로운 유럽의 비전’에는 유럽연합군이 포함된다. 다음달 유럽 10개국 국방장관들을 파리에 초청, 10만명의 유럽 신속대응군 구성문제를 논의한다. 당초 마크롱의 아이디어에 뜨악했던 영국과 독일은 핵합의를 뒤집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본 뒤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미셸 뒤클로 몽탠뉴 연구소 자문은 이란 문제에서 함께 활동해온 프랑스와 독일, 영국이 향후 EU 차원의 공동외교에서 핵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는 EU를 유럽이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구성한 일종의 컨소시엄으로 인식한다. EU 자체가 유럽발 전쟁을 예방하는 동시에 미국 상품을 소비하는 강한 경제권으로 만들려는 엉클샘의 포석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따위는 안중에 없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분담금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럽 동맹국들을 무시하고 유럽적 가치를 조롱해왔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중동국장을 지낸 스티븐 사이먼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유럽은 유럽을 신발 털개 정도로 대해온 트럼프에 맞서라고 촉구했다. 이민정책에서처럼 EU는 공동의 대안을 내놓기 쉽지 않은 의사구조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이란 핵합의 파기는 어느 정도 유럽을 뭉치게 하는 시멘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란 문제에 관한 한 브렉시트 지지자인 보리스 존슨 영국 외교장관이나 글로벌리스트인 마크롱 대통령이 한목소리로 미국을 비난한다. 하지만 브렉시트에 발목이 잡힌 메이의 영국이나 국내 정치에서조차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메르켈의 독일이 단호한 공동외교에 보조를 맞출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 첫번째 계기는 미국이 이란과 거래한 기업을 벌주는 세컨더리 제재를 실제 동원할 경우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럽의 대응 여부에 따라 과연 유럽이 부분적으로나마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동맹국 대사로 부임하면 입에 발린 말이라도 덕담부터 건네는 게 외교가의 상식이다. 하지만 미국의 주독일 신임대사 리처드 그르넬은 부임하자마자 “이란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독일 기업들은 즉각 사업을 접어야 할 것”이라는 엄포를, 그것도 트위터 메시지로 날렸다. 유럽이 또 한번 이러한 수모를 견딜 것인지, 다른 목소리를 낼지 두고 볼 일이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주요 7개국(G7)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만 해도 절반에 가까운 45%였지만 올해 31%로 줄었다. 2050년에는 5분의 1(20%)에 그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전망치이다. 반대로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가들의 GDP는 1995년 22%, 2015년 36.3%, 2050년 50%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르몽드는 위의 전망치를 곁들인 특집기사에서 이란 문제를 계기로 ‘세계는 탈서구화를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미국의 이란 핵합의 파기는 역설적으로 글로벌 어젠다를 홀로 결정하는 미국의 힘을 상기시켰다는 정치학자의 말을 전하면서 “서구는 서구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결어로 글을 닫았다. 문제는 속도다. 세계의 탈서구화는 물론 탈미국화가 진행되고 있다. 천천히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유럽의 독립’이 발등의 불처럼 다급하게 진행될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EU 지도자들이 다음달 8~9일 캐나다 G7 정상회의에서 트럼프와 대면한다. 이란 핵합의 관련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주목해볼 만한 계기다.

유럽은 이란 핵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안정될 때까지, 미국과 이란 중간을 오가며 다시 품을 들여야 한다. 그때까지 어쩌면 미국의 ‘신발털개’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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