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캐나다 퀘벡시티 거리에서 주민들이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총리의 사진을 든 채 반 G7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앞쪽의 작은 펼침막들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인권 문제를 거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다. 질서를 대체할 것은 무질서일 뿐이다…. 30여년 전인가, 나는 레흐 바웬사와 다른 솔리대리티 활동가들과 함께 그다니스크 조선소에서 미국 대통령을 맞았다. 폴란드 공산주의의 몰락을 함께 축하했다. 이후 폴란드 총리를 지내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찾아 미군과 폴란드군 병사들을 만났다. 며칠 전에는 (전승기념일을 맞아)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의 미군 묘지를 방문했다. 나에게 대서양 양쪽의 단합 외에 좋은 대안은 없다는 생각과 마음을 상기시켜주는 장소들이다….” 지난 8일자 뉴욕타임스 1면 칼럼으로 실린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의 글이다. 냉전과 탈냉전을 거쳐온 격동의 세월 동안 서구가 공유해온 역사와 가치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싱가포르 ‘북·미 대좌’가 세계의 눈과 귀를 빼앗고 있었던 지난 8~9일 캐나다 퀘벡주 샤를부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는 또 하나의 ‘세기의 사건’이 발생했다. 싱가포르발 한반도 뉴스의 쓰나미에 파묻혔을 뿐이다.
투스크가 정상회의 개막일에 맞춰 보낸 기고문은 자못 비장한 소회를 담고 있다. 지난해 파리 기후협정 탈퇴에 이어 최근의 이란 핵합의 거부, 철강·알루미늄 제품 관세 부과 등 잇달아 충격을 던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을 앞둔 심정을 털어놓았다. “서구의 예측 가능함과 안정이야말로 혼란과 폭력, 오만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을 준다”면서 대서양 동맹의 단합을 호소했다. “누군가 내가 감상에 빠져 있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역사와 상식을 다시 일깨웠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정치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해관계의 게임이 아니다. 잔혹한 힘을 시험하는 게임도 아니다.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던 미국인과 유럽인들 덕분에 세계는 더 나은 장소가 됐다”고 외쳤다. 이번 G7에서 미국의 최근 결정들이 과연 일회적인 진통인지, 새로운 전략적 흐름의 시작인지 확인하겠다는 결기도 읽힌다. 하지만 주류 엘리트 정치인과 포퓰리스트는 각각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다. 기성 정치인은 결코 대놓고 돈 이야기를 하는 포퓰리스트를 당할 수가 없다. 트럼프는 이번에도 유럽의 의표를 찔렀다.
주요 7개국 정상회의 첫날인 지난 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메르켈과 마크롱(메르켈 왼쪽) 프랑스 대통령, 메이 영국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따지듯 내려다보면서 항의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에 트럼프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는 이 사진은, 이번 G7 정상회의의 실패를 상징하는 사진인 동시에 세계가 전혀 새로운 연대기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으로 남게됐다. 역시 팔짱을 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입을 벌리고 있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무대의 극적인 디테일을 더한다. 로이터연합뉴스
■ 끝내 현실이 된 ‘투스크의 경고’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싱가포르로 떠나면서 공동 코뮈니케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내놓았다. 에어포스원 기내에서 날린 트위터를 통해서다. 주최국인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 트럼프의 출국 뒤 한 기자회견 발언을 꼬투리로 삼았다. 트뤼도 총리는 캐나다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미국의 새 관세 부과를 ‘일종의 모욕’이라면서 보복관세 부과를 다짐했다. 트럼프는 트위터 메시지에서 “기자회견장에서 내놓은 저스틴의 거짓 성명과 캐나다가 미국 농민과 노동자 및 기업들에 대해 막대한 관세를 물리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미국 대표들에게 코뮈니케를 승인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G7의 산파인 미국이 스스로 잉태한 질서의 파기를 선언한 것이다.
외교적 결례 따위는 트럼프의 사전에 없다. G7 샤를부아 정상회의를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한 주최국 총리는 무색해졌다. 트럼프는 “회의에선 그리 온순하던 트뤼도 총리가 내가 떠난 뒤에야 미국의 관세가 모욕이라고 말했다”면서 “매우 부정직하고 약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은 더 이상 다른 나라들의 금고가 아니다”(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에 칼을 꽂는 배신”(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지옥에 트뤼도를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는 측근들의 악담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치명타는 이미 트럼프가 날린 뒤였기 때문이다.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서구가 공유한 가치 훼손 경고
“공동 코뮈니케에 서명 않을 것”
트럼프는 G6과 거리두기 행보
미, 동맹보다 돈을 우선 순위에
좋았던 과거에 머문 유럽 압박
‘원칙적 현실주의’ 전방위 위세
세계는 신질서 여명기인지도
주요 7개국 정상회의 첫날인 지난 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때만해도 메르켈과 서방 지도자들은 트럼프를 설득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럼프는 다음날 코뮈니케에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유럽 동맹국들과 무관하게 마이웨이를 걷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로이터연합뉴스
■ G7, G6+1(미국)인가 아니면 G7+1(러시아)인가
이번 정상회의의 실패는 지난 1일 미국의 새 철강·알루미늄 관세 발표에서 비롯됐다. 다음날 폐막한 G7 재무장관회의에서는 미국을 뺀 나머지 6개국 장관들만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G7이라기보다는 G6+1(미국)”이라는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의 푸념이 이를 말해준다. 탈냉전 이후 국가 간의 모든 협상의 주제는 돈이다. 무역 및 관세 갈등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전혀 다른 품종임을 세계에 거듭 각인시키고 있다. G7 재무장관회의이건, 정상회의이건 공동발표문에서조차 미국이 빠진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트뤼도가 ‘모욕’이라고 한 까닭은 관세가 미국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트럼프의 논리 때문이다. “어떻게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머나먼 땅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미군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캐나다인들에게 ‘국가안보’를 이유로 대느냐”는 정당한 항변이었다.
이쯤 해서 트럼프의 세계관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세계에는 돈과 동맹의 가치가 공존한다. 그중 우선순위는 돈이다. 돈 문제야말로 트럼프의 북극성이다. 자신의 콘크리트 지지층(Base)이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베이스를 보고 게임을 하는 야구선수처럼 모든 결정을 지지층을 보고 하는 트럼프에겐 양보할 수 없는 선이다. “오늘부터 아메리카 퍼스트밖에 없다. 무역과 세금, 이민, 대외관계에서의 모든 결정은 미국 노동자와 미국 가정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내리겠다”는 취임사 약속을 지키는 것인 동시에 스스로 ‘원칙적 현실주의(Principled Realism)’라고 상표를 붙인 트럼프 독트린의 핵심이다.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제 드러난 결과를 토대로 결정할 것이라는 트럼프의 원칙적 현실주의는 특히 돈 문제에서 급진적으로 미국 중심이다.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나바로의 글은 트럼프가 G7 비공개회의에서 쏟아냈을 ‘복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태반이 숫자다. 독일 640억달러, 일본 700억달러 등 독일과 일본이 지난해 미국과 상품교역에서 거둔 흑자 규모를 걸고 넘어졌다. 그 흑자가 없어질 때까지 미국은 ‘최대의 압박’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앙심이 읽힌다. 그다음 말이 더 흉악하다. 미국 내 독일 기업들의 자동차 공장들은 허울일 뿐, 25~35%의 부품만 미국에서 제조한 것으로 조립공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더 이상 미국 내 공장을 지어도 필요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서비스교역을 포함하면 불균형이 줄어든다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반론은 중요치 않다. 유럽이 G6를 한탄하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느닷없이 G8의 부활을 촉구했다. 정상회의 첫날 “G8이 G7보다 더 의미 있는 그룹”이라면서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뒤 축출된 러시아 복귀를 주장한 것이다.
지난 6월9일 캐나다 퀘벡시티에의 포르트 생루이 앞에서 이날 폐막하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출범한 G7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핵심 기제였지만 세계화에 치이고, 기존 질서에 신음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여기에 탈냉전과 세계화에 이어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맡아왔던 미국의 배타적 애국주의 풍조로 인해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 유럽의 ‘존재론적 위기’
투스크는 감상에 젖어 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당분간 달리 선택지가 없는 게 문제다. G6 국가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렇다. 이탈리아는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집권을 했고, 영국은 지난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유럽가족’과 이별을 하고 있다. 그나마 독일 정부가 트럼프의 관세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결국은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총선 9개월을 꽉 채우고야 연정을 꾸린 메르켈 총리의 처지가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외쳐온 ‘강력한 다자주의’는 공허한 외침이 된 지 오래다. 지독한 공개망신을 당한 캐나다 총리실은 “우리는 정상회의에서 달성한 모든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직접적인 대응을 삼갔다.
G6가 직면한 현실은 외교적 결례와 무역질서의 와해 따위가 아니다. 세계를 이끌어왔던 대서양 동맹과 그 대서양 동맹이 유지해온 자유주의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벤저민 로즈는 최근 펴낸 회고록 <있는 그대로의 세계(The World As It Is)>에서 트럼프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17일 메르켈이 베를린을 찾은 오바마를 보내면서 눈물을 글썽였던 사연을 전했다. 실비 카우프만 르몽드 논설위원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질서가 종말에 다다르고 있다”면서 “하지만 트럼프 훨씬 이전에 시작된 과정”이라고 짚었다. 오바마는 터치가 부드럽고 우아했을 뿐 임기 8년 내내 “바보 같은 짓(stupid stuff)을 하지 말자”는 생각에 미국의 진면목을 은폐했다. 유럽인들은 이를 부정해왔으며 그 증좌가 메르켈의 눈물이라는 통찰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가 최근 펴낸 <있는 그대로의 세계> 오바마 행정부 당시 직접 겪은 외교안보적 디테일을 담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 제목 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트럼프 취임 이후 세계는 미답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트럼프 이전'에도,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될 도도한 흐름이다.
연장선상에서 트럼프주의는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카우프만은 한 프랑스 안보전문가의 말을 빌려 “러시아 탱크가 라트비아를 침공한다고 해도 과연 미국이 대응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중국과 러시아가 대안이 될 수도 없는 일. 바로 지난주 유럽 외교관계협회(ECFR) 연례회의에서 조지 소로스가 짚어낸 유럽의 ‘존재적 위기’인 것이다.
세계는 지금 위험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구질서는 무너지는데 새 질서가 자리 잡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의 포퓰리스트들은 환호하고, ‘좋았던 과거’에서 깨어나지 못한 비포퓰리스트들은 여전히 부인하는바,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세계는 더 이상 없다. 유럽만의 문제, 통상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원칙적 현실주의는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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