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벽두에 단행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은 올 한해 한반도 문제의 전개에 무거운 시사점을 던진다. 조짐이 그리 좋지 않다. 지난해 한반도 평화의 과제를 남북·미 정상이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끌어왔다면, 올해는 중국이 포함된 다자구도가 전개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문제가 미·중 간 ‘강대국 정치’에 포획됨으로써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외교로 틀을 갖춘 북한-(한국)-미국의 3각 구도 대신, 미국-북한-중국의 3자 구도가 전면에 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를 용납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북·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적극적 요소(要素·8일 중국 외교부 루캉 대변인)’가 확인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중 양국이 지난 10일 발표한 장문의 정상회담 결과문을 뜯어보기 전에 김 위원장이 지난 7일 베이징행 전용열차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미·중이 무역전쟁을 타결짓기 위한 막바지 협상이 베이징에서 진행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중 사이에 뛰어든 것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난해 4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핵무력과 경제발전의 병진정책을 접고, 경제발전에 매진키로 방향을 설정한 북한에 중국은 과연 무엇일까. 또 미국과의 갈등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에 북한은 과연 무엇일까.
김 위원장이 모종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징후는 지난 1일 신년연설에서 포착됐다. 늘 그렇듯이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가 발표되면 국내외 전문가들은 총천연색의 해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하면 ○○할 것’이라는 식의 추측에 머문다. 이번 신년사에서는 특히 김 위원장이 “미국이…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대목이 주목을 받았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북·중 외교 강화라는 점을 지적한 사람은 루디거 프랭크 빈 대학 교수였다. 프랭크 교수는 지난 2일 북한 전문매체 38노스 기고문을 통해 ‘새로운 길’은 트럼프를 상대로 “당신은 북한의 안보와 경제 발전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협력을 거부하면 우리는 당신을 무시하고 중국을 바라볼 것이다. 한국도 함께 데려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준 것으로 읽었다. 북한이 미·중 무역전쟁에서 ‘냉전 2.0’의 상황을 발견하고 1950년대 이후 김일성 주석이 중·소 간에 펼쳤던 균형외교를 시작할 것임을 시사했다는 해석이었다. 김 위원장이 미·중의 갈등 또는 경쟁공간에 뛰어들어 활로를 모색할 것이라는 프랭크의 분석은 북·중 정상회담의 성사로 일단 들어맞았다. 미·중이 북한의 의도에 따라오지 않더라도 핵 위협을 통해 미·중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때론 한·미가 아닌, 한발 떨어진 시선이 긴요하다. 김 위원장의 방중 이전을 남달리 보았으면, 방중 이후도 남달리 보고 있을 터. 오스트리아에 있는 프랭크를 지난 10일 호출했다.
-‘새로운 길’을 짚어냈다. 김 위원장이 왜 베이징으로 달려갔다고 보는가.
“일단 북한이 지난해 중국에 보여주었던 우호의 상징을 잇기 위한 면이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처음 방중했다. (싱가포르까지) 중국 여객기를 사용했다. 늘 자존심을 내세워온 북한으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오성홍기가 찍힌 중국 비행기를 사용했다고 내외에 공개했다. 중국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메시지들이었다. 김정은의 방중은 이러한 상징 라인을 잇는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 문제의) 다른 행위자들에 대한 압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어떤 압력인가.
“김정은은 문 대통령이 국내의 강한 압력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한국으로부터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리아’를 자신이 역사에 기록되는 도구로만 여긴 것 같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자의) 각광을 훔쳐갈 것이라는 강박감에 쫓겨 행동에 나설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주도권의 상실이다.”
-북한이 ‘중국 카드’를 쓴다면 중국은 ‘북한 카드’를 쓰고 있다. 중국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지금 지정학적인 분기점에 있다고 본다. (탈냉전 이후) 거의 30년 동안 미국의 분명한 의지에 반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제제재의 벌을 받거나 도덕적 공격이나 군사적 침공을 받았다. 중국은 미국 헤게모니의 대안임을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잠재력을 사용하려는 게 분명하다. 기술의 원천일 뿐 아니라 수출 시장, 수입의 주요 원천, 군사적 안보의 제공자, 더 나아가 소프트파워와 정치적·도덕적 정당성 제공자로서의 잠재력을 말한다. 중국에 북한은 이런 점에서 시험적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내보내는 신호다. 성공한다면 많은 나라들의 전략적 고려에서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 많은 것이 걸려 있기에 중국은 북한에 많은 것을 제공하려 할 것이다. 중국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중이 10일 각각 정상회담 결과 발표를 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흔한 트위터 메시지조차 날리지 않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프랭크의 분석은 예상 범위를 넘지 않으면서도 북한의 ‘후방 기지’로서 중국을 크게 봤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의 전망은) 순전히 추측의 영역이다. 다만 미국은 사찰 또는 북한의 미사일과 핵탄두 한 두개를 공개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돌파구를 열기를 바랄 것이다. 북한은 제재의 부분적인 해제를 요구할 것이다. 비핵화 합의에 서명하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자신의 전략적 자산(핵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악의 경우 북한의 목표는 북·미 정상회담이 극적으로 실패토록 함으로써 그 책임을 미국에 돌리고 평화와 안보, 안정의 보장자로 중국을 바라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 방중이 프랭크의 분석대로 미·중 헤게모니 다툼의 전환점이 될지는 미지수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의 ‘희망사항’일 수도 있다. 북·중 정상회담을 세계사적 사건으로까지 해석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이다. 현단계에선 ‘제3의 시각’으로 읽을 따름이다.
북·중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정상회담 결과문을 보면 한반도 문제에 관한 양측의 기본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거듭 확인하고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시 주석은 비핵화의 명분에 공감하면서 “조선 측의 합리적인 관심사항이 마땅히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리적인 관심사항’은 핵무기를 내려놓고 난 뒤 또는 그 과정에서의 체제보장을 말한다. 북·미 싱가포르 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1항)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노력(2항) 및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3항)을 순차적으로 배치했다. 미국은 그러나 이후 3항에 몰입하면서 1, 2항의 체제보장 부분은 밀쳐두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 연구위원 역시 북·중 정상회담의 목적을 두고 비핵화 문제만을 떼어놓고 다그치는 미국을 상대로 한 경고라는 점에서는 프랭크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 위원은 지난 9일 “지난해 5월 6~7일 다롄에서 열렸던 2차 북·중 정상회담 당시 북·중이 합의한 바,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고도 미국이 체제보장을 하지 않을 경우 중국이 보험이 돼 줄 수 있다는 약속의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다롄 회담 직후 트럼프와의 통화에서도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소해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 위원은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집중 논의했다기보다 북·중 간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제반 협력을 종합적으로 확인하는 성격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북·중은 발표문에서 양국 간 교류협력을 강조했다.
문제는 중국이 들고나온 6자회담의 부활이다. 루캉 외교부 대변인은 6자회담을 두고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추동하고 가장 적극적인 성과를 얻어낸 프로세스”라면서 “중국이 이 과정에서 하나의 요소라면 시종일관 적극적인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는 꼭 프랭크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한국이 설득과 중재를 맡았던 북-(남)-미 틀의 해체 또는 심각한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종전선언은 평화체제로 가는 첫걸음이다. 종전선언에는 중국을 배제하고 북-(남)-미 간에 기본 골격을 만든 뒤 평화협정의 최종단계에서 중국을 포함시키려는 게 미국의 복안(조성렬 연구위원)이었다. 그렇다면 한반도 논의의 다자구도화는 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 중국의 숨은 의도 때문이다.
한반도 사안의 핵심은 비핵화와 평화체제다. 이 중 비핵화가 움직일 때 북·미 대화가 원만해진다. 평화체제가 주의제로 오르면 북·중이 ‘한 참모부’를 구성한다. 북한의 선택에 따라 미국과 중국을 각각 대화 파트너로 삼을 수 있는 구조다. 북한이 중국을 만나 공동의 전략·전술 협동을 도모한다면 필연적으로 종전선언과 평화체제는 물론 유엔사 및 주한미군의 지위를 다룰 수밖에 없다. 북·중·미의 동상이몽 때문이다. 미국은 비핵화를 우선하지만 북한은 체제보장(평화체제)을 앞세운다. 중국은 ‘한반도 내 미국’의 존재라는 잿밥에 주목한다. “한·미 군사동맹은 냉전의 산물”이라는 게 중국의 공식입장이다. 이러한 중국의 의도가 짙게 투영된 다자회담은 비핵화 진전-대북 제재 부분 해제로 내달리려는 한국의 복안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다. 북·미는 지난해 10월 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 이후 대화의 끈을 놓고 있다. 주로 북한이 미국 측의 의사타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물밑 접촉을 시작했지만(조윤제 주미대사), 본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논의까지는 가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과 멕시코 국경 장벽에 발목이 잡혀 있다.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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