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백악관 앞에서 우산을 쓴 채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플로리다주의 허리케인 피해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나선 길이라 점퍼 차림이다. 워싱턴 | 로이터연합뉴스


“북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흠. 지금까지 엄청난 성취를 이뤘다. (지금까지만?)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지금까지다. 거래는 거래다. OK? 부동산 거래든, 소매물품 거래든 마찬가지다. 내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은 북한과 전쟁을 하려 했다. 취임 초기 몇달 동안에도 우리는 북한과 전쟁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우리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 더 이상 미사일 발사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CBS방송의 시사프로그램 <60분>에서 말한 내용이다. 대담자는 원로 저널리스트 레슬리 스탈(76).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지금까지 단 한 개의 핵무기도 제거하지 않았다. 계속 미사일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스탈의 질문에 “그들은 (핵 및 미사일) 시험장들을 닫고 있다”고 반박했다. “신뢰하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이 맞다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그(김정은)를 신뢰한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물러설 스탈이 아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이후 역대 대통령을 ‘링’ 위에 올려놓았던 그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트럼프가 지난달 말 중간선거 유세장에서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이력을 읽어주고 싶다. OK? 압제와 강제수용소, 굶주림의 잔인한 왕국을 통치하고 있다. 이복형을 암살시켰다는 보도도 있다. 노예노동과 공개처형…. 이런 친구를 사랑한다고 했는가.”

“다 알고 있다. 나는 아기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했지 않나?) 비유적 표현이었다. 그와 사이좋게 지낸다. (포옹인가?) 그렇다고 치자.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뭐라 불러도 좋다. 더 이상 끔찍한 위협도, 전쟁도 없지 않나.” 최근 되풀이해온 북·미협상에 대한 낙관의 연장선상이었다. 여유마저 보이고 있다. 지난달 26일 뉴욕 회견에서 “시간 게임을 하지 않겠다. 북핵 협상의 타결 시점이 2년 뒤건, 3년 뒤건, 아니면 5개월 뒤건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미국 중간선거는 외교 관심 밖
북핵 문제 해결 일단 거리두기
2차 북·미 정상회담 물밑 협상
내달 중간선거 이후 날짜 확정

북 “경제발전 2020년까지 성과”
미 “2020년 말까지 비핵화 성과”
비핵화·제제 완화 상응조치로
종전선언 등 요구 항목별 조율

불가역적 비핵화까지 제재 유지
트럼프 지연작전 이어갈 가능성
중국·러시아는 대오 이탈 조짐
미국 상응조치가 협상 진전 열쇠

트럼프는 그러나 다른 한편 대북 강경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달 29일 리용호 외무상의 유엔총회 연설을 기점으로 북한이 본격 요구하고 있는 제재 완화 문제다.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이전에는 제재의 고삐를 계속 조일 것을 공언하고 있다. 스탈과의 인터뷰에서도 제재 완화 가능성을 단호하게 차단했다. “(다만) 북한과 만나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한국 정부가 대북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국무부는 거의 일상적으로 제재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0일 아예 “그들(한국)은 우리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우리의 자존심을 긁었다. 얼핏 말과 행동이 달라 보이는 트럼프의 이중적인 입장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국내정치적으로 트럼프는 11월6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연일 유세장을 뛰어다니며 공화당 상·하원 의원의 선거운동을 거들고 있다. 물론 미국 중간선거에서 외교안보 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분야별 정책집을 내놓는 대선에서는 그나마 외교문제가 거론되지만,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유권자들이 웬만해서는 대외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다. 중간선거가 트럼프의 대북정책을 바꿀 분기점이 된다기보다는 물리적으로 바쁘게 할 뿐이라는 게 사실에 가까운 진단일 게다.


더구나 지난 6일 브렛 캐버너 미국 연방대법관이 취임하기 전까지는 그의 상원 인준청문회로 경황이 없었다. 한숨 돌리려 하자 이번에는 터키에서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의 토막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자칫 이란을 죽이고, 사우디를 살려온 중동정책의 지각을 바꿀 대형사고다. 트럼프가 지난 16일 AP통신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에 관한 질문을 받고 “회담을 하긴 하겠지만 중간선거 이후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이곳(미국)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이유일 게다. 미국에 다른 협상가는 많지만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돼온 북핵 문제는 트럼프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웨스트 버지니아주 윌링의 한 체육관에서 열린 중간선거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워싱턴/EPA연합뉴스


북한의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볼 때까지 제재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도 있다. 비핵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다른 어떤 대안이 없다는 절박감을 주지 않는 한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과 러시아의 대오 이탈 조짐이 완연해지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대북 제재를 둘러싼 미국과 중·러 간의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폼페이오 장관이 ‘실질적 진전’을 이뤘다고 자평한 4차 방북을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간 지난 9일, 사의가 발표된 니키 헤일리 유엔대사가 치르고 있는 마지막 전투가 대북 제재 문제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포린폴리시 등 미국 언론에 의해 일부 내용이 공개된 유엔 대북 제재 전문가 패널의 8월3일자 보고서에는 제재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 있다. 지난 1월부터 5월 말까지 북한의 남포·나진·원산항에서 하역작업을 한 유조선 89척의 저유량은 이미 140만배럴로 안보리 제재 2397호에 따른 한도(연 50만배럴)를 넘는다. 여기에 39개 러시아 기업과 200여개의 중국 기업들이 북한과 합작 형태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물론 중·러는 보고서의 수치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의 힘겨루기 속에 보고서 자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중·러는 한편 지난 9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모스크바에서 3국 외교차관회의를 열어 특히 각국의 독자적 대북 제재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취임 초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던 북핵 문제에서 여유가 생기면서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지난 17일 “미국 입장에서 중국 및 중국과의 무역 이슈는 세력 균형의 문제인 반면 북핵 문제는 관리 대상”이라면서 “북한이 추가 도발만 하지 않으면 트럼프로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중국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게 된다”고 짚었다. 미국이 제재에 연연하는 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막는 한편 북핵 문제 해결을 유예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중간선거 뒤에도 계속될 노선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는 협상의 한 축인 북한이 미국의 지연작전에 말려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망이다. 북한은 지난 4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사회주의 경제건설’로 전략적 노선을 변경했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통해 2020년까지 성과를 내겠다고 다짐한 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대좌에 나왔다. 제재 완화와 같은 인센티브 없이 비핵화 협상장에 계속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북한의 인내심이 고갈된다면 그다음에 벌어질 상황은 예측이 어렵지 않다. ‘사랑’에 배신당한 북한이 또다시 핵·탄도미사일 시험에 나설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역시 대내외적 어려움에 처할 게 불보듯 뻔하다. 국내에선 그리 요란하게 자화자찬했던 북한과의 성공신화가 깨지면서 비판을 받을 것이고, 국제적으론 관계가 껄끄러워진 중·러를 설득해 안보리 제재를 논의해야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트럼프는 6·12 싱가포르 대좌 직후 기자회견에서 북한 비핵화의 목표를 밝혀놓았다. “20% 정도 진전되면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힌 그가 연말까지라도 북핵 해결을 미룰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무리다. 폼페이오는 ‘2년 반 뒤(2020년 말)’ 비핵화의 주요 성과를 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비핵화의 1차 목표를 북한 핵탄두의 60% 정도 제거로 잡은 서훈 국정원장의 예상을 합해보면 한·미 간 목표 설정 작업은 이미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제재 완화 문제의 문턱을 넘지 못해 북·미협상이 좌초될 것 같지는 않다. 패전국과의 일방적인 협상이 아닌 한, 한쪽이 모든 것을 내놓은 뒤에야 다른 쪽이 상응조치를 내놓는 경우도 없다.

북·미는 폼페이오 방북에서 이미 2차 북·미 정상회담 탁자에 올려놓을 의제에 대해 물밑 합의를 했을 수도 있다. 북·미가 종전선언과 북한의 추가 조치 간의 ‘작은 거래’를 성사시키고 북한은 제재 완화의 또 다른 골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미국은 그 방어의 일환으로 제재 유지를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폼페이오 방북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에 합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미가 각각 요구 목록을 올려놓고 항목별로 교환 또는 조율하는 문제만 남겨두었다는 분석이다.

북·미 간 ‘이상한 로맨스’는 결국 중간선거 이후 열릴 트럼프-김정은 대좌에서 성격이 보다 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을 열기로 한 것 자체가 진전이 있음을 말해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스탈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트럼프만 세 번 인터뷰했다. 그는 CBS 홈페이지에서 “당선 사흘 뒤에 만난 트럼프는 (당선 사실을 못 믿었는지) 충격에 휩싸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트럼프는 완전히 확신에 차 있었다. 진짜 대통령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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