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나는 어린아이였다. 우리 모두는 매일 밤 TV에서 월터 크롱카이트가 이곳에서 벌어진 뉴스를 전했던 걸 기억한다. 우리 동네에서도 많은 가정의 아들과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과 베트남 역사에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 내가 미국 국무장관으로 하노이를 찾게 될 것이라고는 당시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한과 베트남, 그리고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해 7월8일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에서 한 연설의 한 단락이다. 그는 국무장관으로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소회를 전하면서 1995년 수교 이후 미국과 베트남이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됐음을 수치를 들어가며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관계는 연설의 도입부에 불과했다. 전반을 흐르는 주제는 북한이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여운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하노이 방문 전날까지(6~7일) 평양을 찾아 고위급회담을 하고 온 길이어서일까. 어쨌든 한 나라의 외교수장이 방문국 수도 한복판에서 방문국 상공인, 외교관들을 앉혀놓고 제3국(북한)을 오디언스로 격정 연설을 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폼페이오가 전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베트남을 보라!’였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장소가 베트남으로 발표된 뒤 새삼 꺼내본 연설문이다.
폼페이오는 미국·베트남 관계의 눈부신 발전을 언급한 뒤 “언젠가 북한과도 같은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뒤 곧이어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이 한때 상상조차 못했던 번영과 동반자 관계를 베트남과 갖고 있는 점에 비추어 김 위원장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의 나라도 이러한 길을 밟을 수 있다고 믿는다. 기적은 당신과 북한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무엇을 추구하는지 분명히 해왔다. 이제 선택은 북한과 북한 주민들에게 놓여 있다. 그들이 이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북한 주민들은 김 위원장을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내놓았다.
연설 전날 북한이 평양 방문을 마치고 떠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미국 측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나왔다”(외무성 대변인 담화)고 힐난을 퍼부은 뒤에 한 연설이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레티투항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2월11일 2차 북미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리게된 것과 관련, “베트남은 2차 미·북 정상회담을 환영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대화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베트남은 (미·북) 양측과 협력해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적극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내놓았다.
돌이켜보면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베트남을 강조해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물론 북한 입장에서도 베트남의 ‘장소성’이 주는 함의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평양~하노이 거리가 2400㎞인 만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용기 참매1호의 운항에 문제가 없다는 기술적 이점은 후순위다. 미국과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국가라는 상징은 매력적일 것이다. 여기에 김일성 주석이 1958년과 1964년 두 차례 방문했던 하노이를 김 위원장이 찾는 것은 올해 태양절(4월15일)을 앞두고 북한 국내에 강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베트남을 보라!”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일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하노이를 발표한 뒤 베트남 정부는 차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레티투항 외교부 대변인이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베트남은 2차 미·북 정상회담을 환영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대화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베트남은 (미·북) 양측과 협력해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적극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의 의미를 적극 홍보하는 것은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다. 로버트 팔라디노 국무부 부대변인은 “베트남은 미국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반자가 됐다. 또 평화와 번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회담 장소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트위터 메시지로 “북한은 김정은의 지도 아래 경제강국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종류의 로켓, 경제적 로켓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이 추구하는 경제강국의 모델로 베트남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의 예를 들어 미래 안보의 동반자 역할을 시사했다. 베트남은 과연 미국의 희망대로 ‘북한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하노이 북·미 대좌를 앞두고 관심이 머무르는 지점이다.
베트남전 참전국으로 관계를 시작, 1992년 수교 이후 경제협력을 강화해온 한국민에게도 여느 동남아 국가와 다른 정서를 자아낸다. 과거의 기억만 소환하는 게 아니다. 미국과 베트남, 미국과 한반도, 중국이 과거와 현재로 얽혀 온갖 상상력이 몽실몽실 피어나게 한다.
북한을 공식 방문한 팜빈민 베트남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왼쪽)이 지난 13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 평양/ AP연합뉴스
■방 안의 또 다른 코끼리, 중국
과거 베트남이 그랬듯이 북한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 제1항에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을 배치한 이유일 게다. 한반도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함께하기로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필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의도가 포함된다. 베트남전의 상흔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미국이 하노이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중국이 있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베트남 경제봉쇄 해제에 이어 국교정상화를 결정할 당시의 중국은 아직 개혁·개방의 과실을 본격적으로 수확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미국에 경제적,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미국은 미래의 우환에 미리 포석을 놓는다는 관점에서 베트남을 바라보았다. 중국의 성장을 내다보고 세력균형 방책으로 ‘베트남 카드’를 선택한 것이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당시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매케인 의원은 “베트남을 경제적으로 활성화시켜 북쪽의 거인인 중국에 맞서게 하는 게 우리의 이익”이라고 말했다(이코노미스트 인터뷰). 베트남전 당시 하노이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그가 베트남 수교를 지지한 것은 과거의 적이 아닌 떠오르는 적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23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한 기념품점에 베트남 국기 문양의 티셔츠와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이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수교 당시 미국의 전략적 관측은 적중했다. 베트남은 미국에 경제적, 군사적 횡재가 됐다. 수교 당시 4억5100만달러에 불과했던 교역액은 520억달러(2016년)로 늘었다. 2014~2016년 3년 동안 미국의 대베트남 수출이 77% 늘었다. 매년 2만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최근 몇년 새 급진적으로 발전하는 분야는 외교 및 군사협력이다. 중국이 휘저어놓은 남중국해(베트남 동해) 영유권 분쟁이 기름을 부었다. 미국은 2013년 베트남과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2년 뒤 공동의 비전성명(JVS)을 채택했다. 2016년 5월 미국이 대베트남 무기 금수를 전면 해제했다. 미국은 베트남 동해의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해밀턴급 해군 함정을 제공했다. 트럼프가 2017년 11월 국빈 방문한 뒤 군사협력은 더 긴밀해졌다. 지난해 3월 칼 빈슨호가 미국 항공모함으론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다낭)에 기항했다. 베트남 해군이 해상종합기동훈련인 환태평양훈련(림팩)에 처음 참가토록 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1년 북한에 유학생으로 갔던 팜녹칸씨(69)가 지난 12일 하노이의 자택 거실에서 북한 출신 아내 리영희씨(70)와 함께 젊은 시절 찍은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1년 6개월의 짧은 사랑 뒤에 헤어졌지만, 애틋한 사연에 감동한 베트남과 북한 당국의 도움으로 2002년 결혼식을 올릴 수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양국관계가 새삼 조명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에 언론의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베트남엔 잠재적 적국, 북한엔 ‘한 참모부’
베트남과 북한은 모두 중국의 접경국가다. 북한은 1420㎞의 국경을, 베트남은 1281㎞의 국경을 접하고 다. 베트남은 캄보디아 침공 이듬해인 1979년 중국과 한 차례 국경전쟁도 치렀다. 한반도 거주민이나 베트남인들이나 중국에 대한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는 한나라 때부터 침탈을 당해온 기억을 공유한다. 북한과 베트남은 냉전 시절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한 경험도 공유한다. 하지만 중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과 베트남의 선택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베트남이 1975년 종전과 캄보디아 침공 이후 중국과 담을 쌓았다면, 북한은 되레 중국 역성을 들어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왕의 북한 체류를 주선하기도 했다.
중국과 소원해진 베트남이 꼬박 20년 동안 추구해온 것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였다. 북한 역시 1990년대 이후 미국과의 수교를 추구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중국이다. 대중 경제의존도가 90%를 웃도는 현실을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북·미 대좌의 역사적인 전환 시기에 중국을 여차하면 미국을 대체할 경제적, 안보적 ‘보험’으로 여기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세 차례의 중국 방문을 통해 북·중이 ‘한 참모부’임을 선언하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기로 다짐했다. 지난달 베이징을 다시 찾은 것 역시 ‘중국 카드’를 십분 활용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김일성 주석 생일인 태양절에 즈음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유도, 미국이 외길이 아님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많다.
베트남 하노이의 한 상점에 미국과 남북한, 베트남 국기가 놓여 있다. 지난 1월29일 촬영한 것이다. AP연합뉴스
북한이 가까운 시일에 중국을 무시하고 미국으로 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미국과 전면 관계정상화가 되고 안보적 우려가 없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북한 역시 베트남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중국과 경제협력은 유지하면서도 안보적으론 경계하는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미·중 사이에서 두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 북한이 여느 아시아 국가처럼 미·중이라는 두 마리 코끼리와 공존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은 정상국가화의 또 다른 지표일 것이다.
■종전선언의 최적지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장소성을 생각하면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굳이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 않더라도 북·미 간 ‘작은 종전선언’도 무방할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베트남을 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기묘한 한 수였다. 북·미 회담의 결과와 무관하게 승리가 확보된 주체는 베트남이다. 싱가포르의 ‘컨벤션 효과’에 더해 201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에 이어 동아시아 외교의 중심 무대로 각광을 받게 됐다. AFP통신이 전한 베트남인들의 환영 코멘트 중에서 관광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의 말이 눈에 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 나라의 두 부분이 통일된 뒤 어떤 모습일지 보게 될 것이다.”
발렌타인데이였던 지난 2월1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하 파고다에서 한 젊은 여성이 기원을 하고 있다. 아직 연인이 없는 싱글 남녀들이 한적한 사원을 찾아 사랑의 행운을 빈다고 한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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