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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베이징, 블라디보스토크는 간이역일 뿐, '평화'의 종착역은 워싱턴이다

by gino's 2019. 4. 26.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의 극동연방대학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9.4.15. 블라디보스토크/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당도한 것은 19년 전이었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한 달 뒤,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린 2000년 7월19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ICBM) 시험발사 유예 약속을 받아냈다. 평화적 목적의 우주 발사체를 러시아가 제공하는 것을 전제로 한 약속이었다. 푸틴의 방북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지도자가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사건’이었다. 푸틴의 여로는 다소 의도적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에 처음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나선 화려한 외출이었다. 장쩌민 주석과 베이징에서 러·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한 뒤 평양에 들렀다가 일본 오키나와로 향했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데뷔하기 위해서다. 세계는 국제 외교무대에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푸틴의 행보에 주목했다. 

‘푸틴의 러시아’가 오랜만에 한반도 논의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이번엔 평양이 무대가 아니었다. 푸틴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초청, 지난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형식을 취했다. 여정은 역순이다. 이번엔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뒤 일대일로 정상회의가 열리는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난 뒤 김정은 위원장의 첫 정상외교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김 위원장이 지난 12일 제14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굳게 손잡고 나가겠다”고 천명한 ‘세계의 모든 평화애호역량’의 첫번째 상대로 러시아를 택한 것이다. 북한은 올해 초부터 북·미 협상의 새로운 ‘중재자’를 찾아왔다. 하노이 회담을 앞둔 지난 1월 방중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내외에 공표한 것이었다면, 하노이에서 미국의 셈법을 확인한 뒤 나선 방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가 돼야 할 한국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를 당당히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고 있다.”(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 또는 북한의 주장에 담긴 '한국'의 위치일 뿐이다.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2년 8월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포옹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재자는 협상의 양 당사자에게 모두 공정한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협상이 막히면 중재안을 내놓고 양측을 설득하는 역량도 필요하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정권과 미국의 관계정상화 과정에서 영국이, 이란 핵합의 과정에서 독일이 한 역할이다. 한·미 동맹에 매인 한국은 공평한 중재를 하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중재를 할 것이 아니라, 북한을 상대로 미국의 논리를 설득, 관철시킬 것을 요구한다. 굳이 트럼프가 아니라 어떤 미국 행정부라도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미국은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재개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위반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대화 촉진책으로 개성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제시하지 못하는 연유이다.

미국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이전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셈법을 바꾸지 않고 있다. 북·미 대화가 겉돌고 있고, 마땅한 중재자가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기댈 언덕’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중국이나 러시아 역시 중재자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다. ‘조력자’는 될 수 있다. 푸틴은 이번에 정확히 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24일 러시아 하산역에 도착해 전용열차에서 내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대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따른 비핵화, 비확산을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과 접근 방식이 다르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해법을 제시해왔다. 대북 제재에 찬성표를 던지면서도, 제재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하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거부감이 강하다. 안보리 논의 과정에서 중국과 함께 미국의 초안을 물타기하는 것은 물론, 중국이 못하는 ‘사이다 발언’도 자주 내놓는다. 푸틴은 북한과 미국이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위기를 고조시키던 2017년 9월 “북한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풀을 뜯어먹더라도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북·미 간에 ‘화염과 분노’ ‘괌 포위사격’과 같은 말이 오가자 “유치원 수준의 싸움”이라고 비꼬았다. 미·중관계에 국가적 명운을 걸고 있는 중국은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이다. 러시아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적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차별성 있는 활동 공간이 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2017년 7월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러·중 공동방안을 내놓았다. ‘조력자’의 역할이었다. 중국이 제안했던 쌍중단(한·미 합훈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유예) 및 쌍궤병행(비핵화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 병행)에 순서를 부여했다. 1단계 쌍중단은 그대로지만 2단계 평화협정 체결을, 3단계 다자간 협의를 통한 지역안보체계의 확립 및 비핵화 협상의 병행 방안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만 바라볼 게 아니라 푸틴이 북·러 정상회담과 거의 같은 시간인 지난 25일 오후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를 서울에 보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역할을 하는 파트루셰프 서기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새로운 ‘러·중 공동행동계획’을 제안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방문 마지막 날인 지난 4월26일 블라디보스토크의 2차대전 전몰 러시아 해군장병 추모시설에서 화환 증정식을 지켜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러 양국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위해 북·러가 유엔 안보리에서 공동행동을 취하겠다는 구상이라고만 밝혔다. 푸틴은 같은 내용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했을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의 기존 입장을 감안하면 2년 전 발표한 1차 러·중 공동방안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당시엔 전쟁위기를 없애는 게 화급했지만, 지금은 북·미 협상을 촉진시켜야 할 계제다. 푸틴은 이번에도 북한의 체제보장을 강조했다. 북·러 단독 정상회담 뒤 회견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선 대북 체제안전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못 박았다. 북한이 핵포기를 가장 망설이는 이유는 체제안전 보장이다. 그게 확보되지 않는다면 핵을 포기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타결되더라도 미국이 제도적으로 평화를 보장하긴 쉽지 않다. 평화조약의 비준에 상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러·중이 다자간 체제안전 보장 체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러·중 역시 비핵화 문제는 북·미가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타결 뒤 대북 체제보장에 힘을 보탤 수는 있다.

푸틴이 6자회담을 거론한 것은 다자간 대북 체제보장을 논의하자는 말이다. 6자회담에서 만들었던 다자안전보장 실무그룹(의장국 러시아)의 부활을 말한 것이다. 2017년 1차 러·중 공동방안에서 제시한 3단계의 구체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문제는 미국이 수용하지 않는 한 러·중 공동방안은 그야말로 ‘조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한반도 문제에서 제3국의 개입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미국은 1차 러·중 공동방안도 수용하지 않았다. 북·미 직접대화 결과 러·중 1차 방안의 1단계(쌍중단)가 됐을 뿐이다. 미국은 김 위원장의 방러에 앞서 지난 18일 스티븐 비건 대북 특별대표를 모스크바에 보내 모굴로프 외교차관과 북핵 문제를 논의케 했다. 자세한 논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 측이 전했을 러·중 공동방안에 대한 미국 입장도 알려지지 않았다. 푸틴이 내놓은 러·중 방안은 이번에도 ‘참고사항’으로 간주될 공산이 짙은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4월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김정은 위원장과의 북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곧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로이터연합뉴스

한반도 문제는 푸틴에게 극동지방 경제를 회생시킬 지름길인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지위를 높일 의제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는 이슈다. 러시아 국민들은 여전히 강대국(Super power)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퓨리서치센터의 여론조사 결과 글로벌 이슈에 관한 푸틴의 활동에 대한 지지도는 87%에 달했다. 하지만 국내, 국제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러시아 경제는 저유가와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제재의 이중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G8에서 제외된 지 오래다. 푸틴은 지난해 8월 대선 승리로 4번째 임기를 시작했지만 국제사회의 고립과 경제난 속에 지지도가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다. 한때 80%를 넘어 고공행진하던 지지율은 지난 1월 조사에서 33.4%로 최저점을 찍었다. 러시아 경제부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1.3%로 낮춰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관되게 푸틴의 러시아에 호감을 표해왔다. 하지만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조사가 종결된 뒤에도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푸틴과의 밀월외교는 언감생심이다. 푸틴이 정상외교를 통해 북한을 지원할 여지는 크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신년 연설에서 밝힌바, “미국이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부득불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던 ‘새로운 길’을 러시아가 내주긴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방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부터 중국, 쿠바, 베트남과 사회주의 국제연대를 복구한 데 이어 러시아 방문으로 대외관계 정상화를 일단락 짓는 소득이 있었다. 하지만 베이징이나 블라디보스토크는 잠시 머물다 가는 간이역에 불과하다. 종착역이 될 수 없다. 비핵화와 북한 체제보장, 나아가 인민경제 발전을 위한 궁극의 해법은 결국 워싱턴과의 담판에서 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종착역에 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 기착지는 베이징이나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다. 바로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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