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A hungry child knows no politics).’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남긴 이 한마디는 인도적 지원, 특히 식량위기에 처한 나라에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됐다. 또 하나의 황금률은 정치적 사안과 인도적 사안의 분리다. 레이건이 누구인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냉전의 정점에서 ‘악의 제국’이 후원하는 공산주의 독재자 멩기스투가 통치하던 에티오피아에 식량지원을 결정하면서 위와 같은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레이건의 한마디에는 생략된 뒷문장이 있을 법하다. ‘배부른 어른은 정치를 너무 잘 안다(A fat grown-up knows too much politics)’가 아닐까 싶다. 지난 5월3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의 식량안보 평가’ 보고서를 발표한 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당위와 담론을 지켜보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가 ‘정치’다.
■ 어른들의 담론- ① 통계의 문제
그동안 한반도 남쪽에서 ‘배고프지 않은 어른들’이 나눈 논의 결과를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북한이 과연 식량이 부족하냐는 점이 가장 큰 관심이었다. FAO·WFP 보고서의 정확성이 도마에 올랐다. 보고서는 북한의 지난해 곡물 생산량을 껍질 포함한 조곡 기준으로 490만t, 알곡 기준으로는 417만t으로 추정했다. 북한의 올해(2018년 11월~2019년 10월) 식량 수요량을 576만t으로 설정하고, 159만t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의 수입량 20만t과 국제기구 지원 2만1200t을 포함해도 136만t이 부족하다. FAO·WFP는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명이 식량부족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국제기구 통계는 우선 15도 이상 경사지의 수확량(최소 20만t)과 개인 소토지(텃밭·7만t) 및 밀수 물량이 빠졌다. 식량 수요 추정의 기준인 인구수가 실제보다 최소 70만명 정도 부풀려졌다는 분석도 있다.(김병연 서울대 교수). 북한 중앙통계국의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한 국제기구 보고서가 왜곡됐을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북한의 중앙 및 지방당국은 물론 국제기구들도 식량 생산량을 가급적 낮게 보고해온 게 사실이다.
FAO는 2010년 전까지 북한의 주식 중 하나인 감자를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후 포함시켰지만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비현실적으로 낮게 책정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FAO 생산연감(Production Yearbook)에 따르면 1997년 북한의 단위면적(㏊)당 감자 생산량을 11t으로 추정했지만, 2010년 이후에는 3~4t으로 잡고 있다.(김영훈·임수경 '북한의 농업·식량 관련 통계', 농촌경제연구원, 2014).
기구 존립의 목적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지난 2월 유엔에서 국제사회의 긴급한 지원을 요구하며 밝힌 올해 식량부족분 50만3000t과도 편차가 크다. 통계는 들쭉날쭉일지언정 가뭄과 이상고온, 홍수 등의 영향으로 2년째 북한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적었다. 북측이 예년 수준(20만~30만t)으로 식량을 수입한다면 식량부족량은 20만~30만t으로 좁혀진다.
북한 장마당 쌀값을 보름 단위로 공개하는 데일리NK에 따르면 5월28일 현재 평양의 쌀값은 1㎏당 4300원(시장 환율 1달러당 8025원 기준)이다. 이는 지난해 12월의 5000원에 비해 외려 700원 내려갔다. 전문가들은 장마당 쌀값 내림세는 공급량이 늘었다기보다 구매력 저하로 수요가 줄은 탓이라고 해석한다. 북한 주민들은 가장 비싼 북한산 쌀 대신 중국산 쌀을 사거나, 쌀이 아닌 옥수수나 감자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식량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우려는 옥수수나 감자마저 넉넉히 장만할 수 없는 취약계층에 집중된다.
취약계층의 식량난은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년 수준이었던 2016년 이후 작황이 나빠지고 있다. 식량이 부족하면 노동력이 떨어지고, 떨어진 노동력은 더욱 식량부족을 심화시켜 만성적인 영양결핍으로 귀결된다. 빈곤지수와 불평등지수가 합해지면 치명적인 칵테일이 된다. 특히 취약계층 아이와 산모에게 주는 타격은 심각하다. WFP가 139만t의 식량 긴급지원을 호소하면서도 곡물을 지원하지 않고 5세 미만 영유아와 산모들에게 영양강화 비스킷과 슈퍼 시리얼만 제공하는 까닭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원 활동을 해온 국제 구호단체들은 일반적인 식량지원 대신 취약계층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컨선월드와이드는 취약계층 텃밭농사(house farming)에 종자·비료·물을 공급하는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강원도와 양강도, 황해북도는 구릉지에 밭이 많아 가뭄 피해가 큰 취약지역이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지난 2월20일(현지시간) 유엔에 전달한 메모에서 “지난해 식량 생산이 2017년에 비해 50만3000t이 줄었다”면서 “노동자 가족 1인당 배급량을 550g에서 300g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했다. 300g이면 햇반 1개 분량이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다음날 공식 브리핑에서 이를 확인하면서 “지난해 작황에 따른 북한의 식량부족분이 140만t에 달한다”면서 시급하게 협의를 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과 북의 정치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김 대사는 “유엔 제재 탓에 필요한 농자재 공급이 안된 것이 (생산량 감소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이라면서 제재의 악영향을 강조했다. 일주일 뒤인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민생에 관련된 제재’의 해제를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민생 관련 제재 완화 요구의 명분 쌓기용이었다고 해석할 여지를 준다.
북한이 유엔에서 식량부족분을 공개한 뒤 정작 한국 정부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농촌진흥청이 북한의 곡물 생산 예상량을 공식 발표했을 때도 반응이 없었다. 농진청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을 455만t으로 예상하면서 전년 대비 3.4%만 줄었다고 발표해서였을까. 그러던 정부가 석 달 뒤 갑자기 대북 식량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WFP와 유니세프에 800만달러를 지원할 방침을 밝혔다. 그나마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가 이어지던 2017년 9월21일에 발표했던 공여 규모였다. 정부는 “정치적 사안은 인도적 지원과 무관하다”면서 지원 방침을 밝혔다. 그렇다면 800만달러는 왜 지금까지 국제기구에 전달되지 않고 있다가 다시 거론됐을까. 작년엔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평화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었다. 북이 원하고, 남이 결정하면 지원하기 쉬웠다는 말이다. 북측 취약계층의 인도적 재앙은 그때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작년엔 남이나 북이나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의 재개 등 민족경제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큰 꿈을 꾸었다. 인도적 지원은 뒷전이었다. 웅지를 품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은 어떤 경우에도 지속돼야 효과도, 명분도 있다. 정치적 문제는 대북, 대미 담판으로 풀어야 한다. 남북관계가 막힐 때마다 지원 카드를 꺼내는 사고는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 명분을 흐릴 빌미를 준다. 혹여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상황 돌파용으로 인도적 지원을 꺼냈다면, 외교적·전략적 상상력의 빈곤을 보여줄 뿐이다.
휴전선 북쪽 동포의 어려움을 도와준다는 정서만으로 접근해서도 곤란하다. 특히 고질적인 문제인 취약계층 지원에는 정치학이 아닌, 과학이 필요하다. 과학적 근거에서 과학적으로 접근해 그 성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남과 북의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북측의 공식 지원 요청-현장 실사-맞춤형 지원-모니터링-정밀한 평가의 과학적 레짐(regime) 구축을 지원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느 과정 하나 빠지면 곤란하다. 당장 어렵다면 과감하게 국제기구에 위임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800만달러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WFP가 지난 2월 집행이사회에서 2019~2021년 3년간 북한 영유아·산모 영양강화 사업에 필요한 재원으로 설정한 금액은 1억6100만달러이다. 국제기구의 부풀리기 관행을 감안하더라도 그 상당 부분을 제공할 재원이 한국에는 넘쳐난다. 박근혜 정부도 WFP와 세계보건기구(WHO)에 1330만달러 지원책을 발표했었다. 유일하게 필요한 정치적 고려는 남측 정부가 요란하고 떠들썩한 지원 관행을 탈피하는 것일 게다. 그냥 조용히 건네면 될 일이다. 아직도 남측에선 인도적 지원의 ‘정치적 효과’를 입에 올리는 분들이 많다.
정부가 할 일은 또 있다. 인도적 지원은 안보리 제재와 원칙적으로 무관하다. 미국도 거듭 이 부분을 확인한다. 실상은 다르다. 유엔 제재위는 손톱깎이 한 개라도 금속물질이 넘어가는 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측이 북측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차량(트럭)은 넘어갈 수가 없는, 기막힌 모순은 이래서 발생한다. 소달구지로 실어 날라야 한다는 말이 된다. 중국에선 열차편으로 운송이 가능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중국 측에 전달해야 할 식량 구입 및 운송비용 송금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5만달러 이상 송금액은 내역을 적어야 한다. 북한 관련 자금이라면, 중국 금융기관들이 혹여 미국이 제3국 금융기관에 가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에 저촉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몸을 사린다. 남측 지원단체들도 께끄름하다.
물론 가장 아쉬운 것은 북한의 정치다. ‘최고 존엄’이 최우선 순위를 놓은 분야는 예외없이 발전했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는 매년 번화한 거리가 일떠섰고, 헐벗은 산에는 나무가 촘촘히 식수되고 있다. 고아원 환경 개선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북한의 육아원(취학전)과 애육원(유치원)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고 한다. 당장 서울 한복판에 옮겨놓아도 될 만한 시설을 갖춰놓고 있다는 전언이다. (북한에선 '고아'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교육기관의 이름을 달리한다.) 오히려 제재 탓에 살림이 어려워진 탄광촌 유치원 아이들이 더 열악한 밥을 먹는다. ‘최우선 순위’가 취약계층 생활 개선에 놓인다면 가장 빨리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라도 빈틈을 메워주는 것이 남측이 국제사회와 함께해야 할 일이다.
북한 매체들은 남측이 논의하는 인도적 지원을 두고 “민심을 기만하는 행위”(조선의 오늘), “부차적이고 시시껄렁한 인도적 지원”(통일신보)이라고 헐뜯는다. 북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어른들은 쌀 구매력이 충분한 사람들일 게다. 남에서 대북 식량지원 자체를 비난하는 어른들도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들일 게다. 정부가 동기가 어떻든 간에 뒤늦게나마 북한 취약계층에 관심을 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중, 삼중으로 에둘러싼 어른들의 정치를 걷어내면, 굶주린 아이들의 허기만이 오롯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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