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1월 말, 중국 베이징역에서 동아시아 분단국의 지도자가 열차에 올랐다. 김일성 주석의 첫 베트남 방문길이었다. 열차 편으로 베이징에서 우한을 지나 광저우에 도착한 뒤 저우언라이의 전용기로 하노이 땅을 처음 밟았다. 비행기로 중국 항저우, 상하이 등을 거쳐 귀국했다. ‘죽의 장막’이 두껍던 시절이다. 그다지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게다. 반면에 지난달 23일 오후 늦게 평양역을 출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용열차는 시종일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의 이번 베트남 방문길은 김 주석의 첫번째 여정과 사뭇 달랐다. 김 주석이 중국 지도부를 만나기 위해 경유했던 베이징과 광저우 등 대도시를 우회, 최단거리를 택했다. 평양~단둥~선양~톈진~스자좡~우한~창사~헝양~구이린~류저우~난닝 코스였다. 행로는 국제정세를 반영한다. 김 주석의 행로는 북한·중국·베트남 3각 동맹의 결속을 말해주지만,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방중으로 이번 베트남행을 분리했다. 국내적으론 김 위원장이 전용열차를 탔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 북한 매체가 출발 당일 보도한 것처럼 평양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는 이미지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김 주석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비록, 두번째 북·미 대좌가 결렬됐지만 김 위원장은 하나의 서사(敍事)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의 상징과 현재의 상징을 순식간에 이었다. 남측이 지난해 4·27 판문점 회담과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서정(抒情)적 이벤트로 풀어낸 것과 사뭇 다른 접근이다.
통치행위로서의 상징, 그 공간의 확대
기실 북한의 상징정치는 어제오늘의 전통이 아니다. 하나의 서사구조로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를 했다.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였기에 일제의 침략을 받았고, 김 주석의 항일투쟁 덕에 해방을 맞았다는 게 서사의 얼개다. 김 주석이 박헌영의 국내파와 박일우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한 뒤 상징을 심화했다. 1967년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주요 계기가 바로 베트남전쟁이었다. 상징을 위한 상징이 아니다. 김 주석의 이미지는 국가 만들기 서사구조의 ‘뇌수’다. 김 위원장은 그걸 재연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서사에서 항일은 항미로 대체됐다. 힘이 없었기에 일제의 침략을 당했고, 미국의 압박과 고립에 힘겨워했다. 이를 단번에 타파할 ‘보검’이 바로 김 위원장 집권 6년차에 완성을 선언한 핵무력이었다. 핵개발의 긴 여정과 비핵화의 또 다른 여정은 하나의 서사구조 안에 놓여 있다.
북한 주민 입장에서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대좌는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가 몸을 숙이고 나왔다는 데 방점이 놓여 있다. 이번엔 김 주석의 상징을 멀리 베트남까지 연장했다. ‘고난의 행군’을 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외교의 공간을 중·러로 제한했다. 김 주석이 중·소를 넘어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 각국을 주유했던 것과 대비됐다. 그만큼 북한은 고립돼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베트남 친선공식방문은 북한이 정상국가로 한발 더 들어선 것이기도 하다.
김일성의 베트남, 김정은의 베트남
김 주석에게 베트남은 사회주의 형제국인 동시에 ‘제2의 전선’이었다. 1958년, 1964년 하노이를 찾았고, 호찌민은 1957년과 1961년 평양을 방문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된 1965년 여름 레탄니 베트남 부총리는 사회주의권 8개국을 순방했다. 북한도 포함됐다. 김 주석은 한국전쟁의 경험을 강조하며, 군수공장과 지휘본부, 격납고 등을 동굴에 마련할 것을 당부했다. 미국 윌슨센터가 공개한 레탄니의 ‘김일성과의 대화’에 나온다. 북한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북한 내 동굴 군수공장을 만들었다. 확전이 임박한 베트남엔 반지하, 반동굴 건설 방식을 권했다. 이를 위해 500명의 전문가와 노무자를 즉각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가 베트남에 제공하지 못할 물품은 국산화하지 못한 탄피와 야전 전화선뿐이다. 우리 경제계획이 늦춰져도 좋다”면서 전폭 지원을 다짐했다. 강철 2만t과 100㎞의 철로, 변압기, 트럭 200대, 견인시설 300개, 디젤엔진 등의 품목도 내놓았다.
북한은 경제발전 7개년 계획(1961~1967) 중이었다. 김 주석이 1962년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을 할 것”이라면서 목표연도로 제시한 바로 그 '몇년 뒤'의 시점이었다. 7개년 계획은 결국 3년이 지체돼 1970년에 완료됐다. 북한 관영언론을 인용한 BBC 보도에 따르면 김 주석은 베트남에 파견한 공군 조종사들에게 “베트남 창공이 우리 창공이라고 생각하고 싸우라”고 말했다. 단순히 공동의 적(미군)을 둔 우방 지원 차원을 넘어섰다. 베트남에 형성된 미국과의 제2의 전선. 김 주석은 이를 내부적으로 ‘최고 존엄’의 상징을 다지는 한편 ‘남조선 혁명’의 기회로 삼았다. 경제개발계획을 연기하면서까지 적극 지원한 동기였다.
“(1967년) 베트남전에 호응해 한국 내 혁명을 조직하고, 필요하면 다시 혁명전쟁을 한다. 그를 위해서 수령의 유일지도를 확립하고 항일 유격대원 정신으로 행동해 달라는 게 김일성의 주장이었다.”(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그해 6월28일~7월3일 당 중앙위 제4기 제16차 전원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항일투쟁의 서사에 유일사상체계가 장착되면서 북한은 이후 ‘최고 존엄’의 새로운 서사를 써나간다.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을 내려보내고, 미군 함정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베트남이 테트(Tet·설) 대공세를 벌인 이듬해 초까지 계속된 북한의 소규모 대남 군사작전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새로 구축된 ‘최고 존엄’의 지위는 유지됐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북한의 ‘핵무력’
베트남 현대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미국을 상대로 10년 전쟁을 벌였지만, 종전 직후부터 미국에 달려가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미국의 ‘무기’는 경제제재였다. 미국은 1975년 종전과 함께 경제제재를 취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대표단이 하노이를 찾은 것은 1977년 3월이었다. 베트남은 불법적인 제재 해제 및 전쟁보상금 우선 지급을, 미국은 관계정상화의 선결조건으로 미군 실종자(MIA)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 논의가 겉돌았다. 베트남은 1978년 9월 무조건적인 관계정상화를 공식 제안했다. 하지만 미·중 데탕트에 접어든 미국의 안중에 베트남은 없었다.
미·베 협의가 결정적으로 어긋난 것은 같은 해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특별한 지위’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중국이 후원했던 캄보디아에 헹삼린 정권을 수립하고, 이듬해 중국과 국경전쟁도 불사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철저히 고립됐다. 베트남의 잇단 러브콜에 미국은 캄보디아 철군을 수교의 전제로 못박았다.
베트남은 1985년 7월 미군 유해 26구를 인계하고 MIA 조사를 2년 내 완결하겠다고 일방 발표했다. 1986년 도이머이(쇄신)를 선언했다.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1989년 캄보디아 전면 철군을 한 뒤에야 대미 협상의 동력을 얻었다. 1991년 중국, 1992년 한국에 이어 빌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제재 해제, 이듬해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물론 북한과 베트남은 다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버린 뒤 미국과 마주 앉았지만, 북한은 ‘핵무력’을 얻은 뒤 미국에 신호를 보냈다. 주고받을 게 별로 없었던 미·베 수교협상과 달리 북·미는 주고받을 것이 많다. 하노이 북·미 대좌를 결렬케 한 미국의 ‘영변 핵시설+α’ 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제안이나, 북한의 인민생활 관련 일부 제재 해제 요구는 모두 완전한 비핵화까지 가는 과정에서 주고받아야 할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회담도 100% 한쪽으로 기울 수 없다. 베트남 역시 미국이 요구했던 국제사회 감시하의 캄보디아 철군이 아니라, 일방적 철군을 했고 이를 워싱턴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았다. 베트남보다 북한의 입지가 낫다. 베트남과 달리 중국이라는 ‘잠정적 배후기지’도 있다.
북한의 국가 만들기는 상징체계의 서사를 법제화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김 위원장의 하노이 방문에서 부각된 ‘오래된 현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연속은 거기까지다. 김 주석에게 베트남이 내부를 다지고 적화통일을 기도할 발판이었다면, 김 위원장에게 베트남은 한국전쟁을 끝내고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발판이었다. 김 주석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경제·군사의 병진노선에서 군사를 택했지만 김 위원장은 핵무력·경제의 병진노선에서 경제를 택했다. 그사이 세계도 베트남도, 북한도 변했다. 하노이 북·미 대좌의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작년 4월 노동당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을 선택한 북한의 국가적 우선순위는 쉽게 바뀔 노선이 아니다. 미국은 비핵화를 포기할 수 없고, 북한은 김 주석이 미뤄둔 ‘이밥에 고깃국’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협상이 필요하다.
북한 ‘최고 존엄’의 상징체계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정치체제를 존중해줘야 한다. 김 위원장은 김 주석의 '상징'을 타고 베트남을 찾았다. 김 주석에게 군사노선의 정거장이었던 베트남이 김 위원장에겐 과연 새로운 서사의 출발점이 될 것인가. 하노이 이후에도 여전히 주목되는 대목이다. 어차피 비핵화는 속도전도, 천리만 운동도 될 수 없다. 하노이 북·미 대좌의 결렬은 비핵화·체제보장의 여정에서 만날 숱한 안전턱의 하나일 뿐이다. 여행이 끝난 곳에서 길은 늘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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